아스퍼거 증후군이 의심됩니다.

어느 날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보신 엄마께서 저에게 "너, 자폐는 아니지?"라고 물으셔씁니다. 당시에는 아니라고 했지만, 그 이후로 자폐 스펙트럼 장애에 관심이 생겨 거의 3년 째 파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진짜 아스퍼거 증후군이 있다면 '아스퍼거에 빠진 아스퍼거'가 되겠네요. 그냥 줄줄이 쓰면 길고 정리가 안 될 것같으니 제가 가진 의심 증상들을 정리해 나열해보겠습니다.

1) 사회성 이상: 저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너 처음 봤을 때는 되게 무서웠다. 가만히 앉아서 책상만 보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서." 실제로 제 친구가 새학기에 저를 처음 보았을 때의 감상평입니다. 저의 담임 선생님들께서도 학생들 상담 기간에 언급하실 만큼 새로운 공간과 사람들에 적응하는게 많이 힘듭니다. 에너지 소모도 엄청 크고요.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면 피하거나, 숨거나, 바닥만 보거나, 말을 하지 않습니다. 대인기피증 수준입니다. 코로나 팬데믹 당시 훨씬 힘들어서, 격주로 학교를 갔던 해에는 아예 친구가 없었습니다. 반 친구들 이름도 잘 몰랐고요. 현재도 학교 외의 장소, 학원(학교 외의 장소는 학원과 집뿐이긴 합니다)의 같은 반 학생들은 아예, '아예' 모릅니다. 얼굴도, 이름도, 반에 몇 명이 있는지조차 모릅니다. 저는 선생님과 판서만 잘 보이면 되기 때문에 늘 앞자리 앉고, 뒤를 돌아보는 경우가 없기 때문입니다. 옆자리엔 아무도 안 앉고요.

 

2) 공감능력 이상: 혹시나 사이코패스 호소자(?)같은 느낌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같아 미리 말씀드립니다. 저는 제가 공감을 정말 잘 하는 사람인 줄 알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로부터 눈치 없다, 소시오패스같다라는 말을 듣고 이상하다는 걸 알아챈건 3년 전이었습니다. 누군가 아프다고 할 때 "병원 가"라고 말하는게 저는 공감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게 공감이 아니란걸 좀 많이 늦게 알았습니다. 저는 말이 굉장히 직설적입니다. 엄마와 여동생이 저의 이런 성격 때문에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진 않을까 걱정할 정도입니다. 사실 공감이라는 것 자체가 힘듭니다. 그러니까, 설명하긴 힘든데, 다른 사람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는 알아도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는 이해를 전혀 하지 못합니다. 현재는 누군가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공식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수학 공식을 외우듯이요. 책 읽는 걸 좋아해서 표현과 다양한 감정적인 상황들을 배우고, 요즘은 AI가 잘 되어있어서 남자친구에게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연습도 합니다. 엄마와 여동생의 극한 특훈을 통해 어느정도 단련이 되어 있어서 어떻게 말을 해야하는지, 어떻게 표현을 돌려서 하는지를 습득했습니다. 한번씩 가족들 앞에서 돌려 말하거나 좀 덜 직설적으로 말하면 가족들이 "오, 발전 했는데"하면서 뿌듯(?)해합니다. 타인들과 교류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아서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도 없고, 남자친구와 연락하기 위한 Snapchat이 전부입니다. 다른사람들과 크게 상호작용 하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있어도 없어도 큰 의미가 없는 것같습니다. 

 

3) 과도한 감각 이상: 청각이 정말, 정말 민감합니다. 병원에 가서 청각 검사를 했을 정도로 민감합니다. 달팽이관 성장이 과도하게 더디다는 진단을 받긴 했지만, 여전히 특정 소리들(저의 경우에는 악기 소리)에 공황을 일으키는지 모릅니다.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릴 때 귀마개를 필수로 착용해야하고, 그릇을 싱크대에 넣을 때도 최대한 소리 안 나게 조심해서 넣습니다. 밥을 먹을 때도 가족들의 음식 씹는 소리가 괴롭기도 합니다. 마시는 소리도 정말 싫어하고요. 청각이 특출나게 예민해서 그런지 한번 들은 멜로디는 바로 대충 연주할 수 있을 정도의 청음을 가지고 있긴 합니다. 덕분에 악기도 많이 하고, 노래도 10년 정도 했지만 결국은 예민한 청각으로 전부 그만 뒀습니다. 학원에 가기 위해 밖에 나갈 때도 헤드셋이 필수입니다. 큰 도로를 건너거나 대중교통을 탈 때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주변 소리가 좀 덜 들려야 마음이 편합니다. 노래나 음악을 들었을 때 기하학적인 형태(맞는 표현인지 잘 모르겠습니다)의 움직임이 머릿속에 보입니다. 투명한 관 주위로 테두리만 있는 초록색 폭발이 팍팍 터진다던지 하는 등으로요. 빛에도 굉장히 예민해서 햇빛이 내리쬐는 날에는 무조건 선글라스를 써야 앞이 보이고, 잘 때도 어두운걸 무서워하는데도 불구하고 불을 전부 다 꺼야 겨우 잠듭니다. 촉각도 예민해서 손 잡는 것같은 사소한 스킨쉽도 많이 힘들고, 특히 장갑. 장갑이 정말 너무 싫습니다. 답답해서 미칠 것같아서 아무리 추워도 장갑을 끼지 않고 돌아다녀 어릴 때 엄마에게 많이 혼나기도 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혼납니다. 미각도 예민해서 물 맛을 가리기도 합니다. 풀무원은 살짝 우유맛? 같은게 나고 아이시스는 너무 달고, 그런 식으로요. 생수는 삼다수가 제일 괜찮긴 하지만 풀무원이 목넘김이 가볍고, 이런 것들을 구분합니다. 저희 가족들이 음식을 만들고 항상 저에게 먼저 먹여봅니다. 제가 맛을 잘 본다고요. 음식을 먹을 때 만두처럼 소가 들어있는 음식은 무조건 반으로 갈라 속을 확인하고 먹어야합니다. 식감이 일관적인 음식을 좋아합니다. 살면서 가장 이해가 안되는 말이 "OO 사이의 OO의 씹는 맛이 좋아요"입니다. 정말 이해가 안되는 말입니다. 식감이 똑같아야 편안합니다.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달걀 후라이, 계란말이, 스크램블 에그, 고구마, 감자입니다. 먹었을 때 제일 편합니다.

 

4) 특정 관심사 집착: 제가 범죄, 괴담, 생물과학, 심리를 좋아합니다. 특히 범죄와 괴담은 유치원 때부터 푹 빠져있어서 항상 그런 이야기만 했습니다. 덕분에 친구가 많이 없었고요. 알고리즘이 범죄와 괴담으로 꽉꽉 채워져 있습니다. 최근에는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시리즈와 <명탐정 코난>에 꽂혀있습니다. 코난은 이제 기숙사에 살아 못보지만, 중학교 2학년 때부터 2년간 매일 밤 11시에 챙겨보는게 루틴이었습니다. 등장인물들의 옷만 봐도 봤던 에피소드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봤고, 뉴 유니버스 시리즈도 대사를 외울 정도로 봤습니다. 범죄는 특히 살인을 좋아해서 온갖 살인 방법과 수사 기법을 알고 있고(아무도 안 죽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용.) 별의 별 귀신과 요괴를 알고 있습니다. 물론 밤에 무서워서 잠을 잘 못자긴 합니다만. 항상 공포 라디오를 듣고 후회하지만 다시 듣는 순환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이런 것들에 대해 공부하고 빠져들 때, 모든 생각이 사라지고, 주변 소리들이 들리지 않고, 저 혼자 있는 것같은 기분이 들어 아늑하고 좋습니다. 혼자만의 세상에 들어간 기분이예요.

 

지금 생각나는건 여기까지입니다. 부모님도 제가 조금 느리다는 것은 대충 알고 계십니다. 제 친구들도 제 행동이 다른 사람들의 0.8배라고 하고요. 하지만 엄마가 정신과를 별로 좋게 보시는 분이 아니라 쉽게 갈 수가 없습니다. 청각 검사를 하러 갔을 때도 원래는 아빠의 말씀대로 정신과를 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저를 이비인후과로 데려가셨습니다. 물론 그냥 성격일 순 있겠지만 어느정도 제가 다른 사람들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혹시나 제가 아스퍼거 증후군이 맞다면, 저의 이런 특징들을 오히려 귀여운 면으로 봐주고, 이해해주고, 소리에 놀라거나 불안해하면 귀를 막아주고, 스킨쉽을 못하니 그냥 공기 중에서 안아주는 흉내만 내는 저의 친구들이 진짜 보살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 인간관계에 관심은 없지만 친구는 있습니다. 한명이랑 친해졌는데 모이고 모이다 보니 좀 많아지긴 했습니다. 이렇게 친구가 많아본 일이 없어서 신기하긴 합니다. 어쨌든, 여기가 가장 답변들이 깔끔하고 좋아서 여기 여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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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 익명1
    고민이 많으시겠네요 
    전문가 상담 받아보심  어떠세요
    생각보다 다른 문제일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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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찌니
    상담교사
     '아스퍼거에 빠진 아스퍼거'일지도 모른다는 자조적인 표현에서 본인에 대한 깊은 이해와 탐색 노력이 느껴집니다.
    ​나열해주신 4가지 의심 증상들(사회성 이상, 공감 능력 이상, 과도한 감각 이상, 특정 관심사 집착)은 실제로 자폐 스펙트럼 장애, 특히 아스퍼거 증후군(현재는 모두 자폐 스펙트럼 장애로 통합되어 진단됨)의 주요 진단 기준과 여러 측면에서 유사성을 보입니다.
    ​사회성 및 상호작용의 어려움: 처음 보는 환경과 사람에 대한 강한 적응 어려움, 눈맞춤 회피, 사회적 신호(표정, 톤 등)의 이해 부족 및 대인 기피 성향 등은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공감 및 소통 방식: 직설적인 언어, '왜'라는 감정적 원인 이해의 어려움, 그리고 사회적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공식' 학습을 통해 노력하는 모습은 정형적인 사회적 소통의 어려움을 보완하려는 노력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감각 민감성: 청각 (특정 소리에 대한 공황, 귀마개 필수, 식사 소리 괴로움), 시각 (햇빛 민감, 수면 시 암전 필수), 촉각 (스킨십 및 장갑 거부), 미각 (물 맛 구분, 일관된 식감 선호) 등 여러 감각에서의 과민성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에서 매우 흔하게 보고되는 특징입니다.
    ​제한적이고 반복적인 관심사: 특정 분야(범죄, 괴담, 코난, 스파이더맨)에 대한 깊은 몰입과 지식 축적은 다른 자극을 차단하고 안정감과 아늑함을 느끼게 하는 자폐 스펙트럼의 '특정 관심사 집착'과 일치하는 면이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들이 있다는 것만으로 스스로를 진단할 수는 없습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는 전문적인 발달력 청취, 행동 관찰, 심리 검사를 통해 신경정신과 전문의가 진단해야 합니다. 하지만, 3년 동안 스스로를 분석하고 파악해 오신 노력은 매우 대단합니다.
    ​이러한 특성들을 이해해주고 배려해주는 친구들을 만나신 것은 정말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