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비슷한 증상을 겪고 있는데 힘드네요 저 스스로 하는 행동들이 도무지 이해가 안되니까요
그 소식을 들은 것은 새해의 들뜬 분위기가 가시지 않은 1월이었다.
오래간만에 걸려온 동기의 전화를 통해
선배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너무 당황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내 입에서 겨우 튀어나온 말은 고작
"아... 그래..?" 였던 것 같다.
내가 알던 선배는 죽었다는 사실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조문을 가기 위해 옷장을 뒤적일 때까지도 현실감이 없었다.
죽음이라는 것도, 조문이라는 것도 아직 낯선 20대의 옷장에는 장례식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옷들 뿐이었다.
이런 옷을 입고 간다면
나를 볼 때마다 엉뚱하다고 했던 선배는 이번에도
"역시 너 답다"라며 큰 소리로 웃어줄까?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왈칵 눈물이 터졌다.
*
선배는 나이가 많았다.
내가 신입생이던 시절,
선배의 동기들은 대부분 졸업을 했지만 선배는 여전히 학교를 지키고 있었다.
우리가 여고괴담 귀신 아니냐며 놀릴 때도 선배는 늘 호탕하게 웃곤 했다.
스무 살의 나는 선배가 좋았다.
선배와 같이 있으면 늘 신이 났다.
선배는 에너지가 넘쳤고 의욕도 넘쳤다.
하고 있는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다고 했다.
가끔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지만
아무 것도 몰랐던 그 때의 나는 선배가 말하는 세상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던 것 같다.
이상한 것은 선배는 어느 날 갑자기 증발하듯 사라져버린다는 것이었다.
며칠 동안 연락도 받지 않고 학교도 나오지 않았다.
여행을 간건지, 진탕 술을 먹고 골골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늘 있는 일이라 대수롭지 않다는 듯 여겼고
나 또한 문득 선배 소식이 궁금해도
과제에 동아리 활동에 아르바이트에 바쁜 나날을 보내며 금방 선배를 잊어버렸다.
*
아직도 선배가 처음 자신의 상태를 말하던 장면이 선명하다.
팀플을 하느라 밤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있던 날, 오래간만에 선배를 만났다.
왜 또 학교에 안나왔냐며 조잘조잘 잔소리를 하던 나를 보며
선배가 평소답지 않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나 조울증 약을 먹고 있어."
*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그날 선배가 나에게 왜 그런 어려운 고백을 했는지 궁금하다.
나에게 도움을 청한 것일까?
아니면 나에게 잔소리 좀 그만하라는 의미였을까?
그때 나는 선배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못했는데,
선배가 얼마나 외롭고 힘든 싸움을 이어갔는지 알게 된 지금은 너무 늦어버렸는데.
아직도 선명한 그날의 공기, 그날의 대화, 선배의 얼굴이 떠오를 때면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한 것이 너무 미안해서 마음이 아려온다.
*
선배는 고등학교때 부터 치료를 받았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했던 선배는 주변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어느 날 선배는 서점에 있던 문제집을 싹쓸이 해왔다고 한다.
밤을 새서 문제집을 풀어 댔고 며칠 밤을 세워도 피곤하지 않았다.
오히려 에너지가 넘쳐서 운동장을 뱅뱅 돌며
학교를 그만두고 유학을 간 뒤 회사를 설립해서 빌 게이츠 같은 세계적인 부호가 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기력이 없어서 씻지도 못하고 며칠을 누워만 있어야 했다.
기이한 환청까지 듣게 된 뒤에야 정신과를 찾았고
우울증에서 조현병으로, 몇 번의 진단이 바뀌고 난 뒤에야 최종적으로 조울증 진단을 받았다.
최상위권이었던 선배는 발병 후로 어렵게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대학에 와서도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간신히 학업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입대를 하기도 했지만
결국 의병 제대를 하고 한동안 입원 치료도 받았다고 했다.
학업이고 뭐고 다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선배는 포기하지 않고 외롭지만 꿋꿋하게 질병과 맞서 싸우는 중이었던 것이다.
*
나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선배는 강한 사람이었다.
특히 우울이 자신을 덮치고
견딜 수 없을 만큼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면 선배는 늘 생각했다고 한다.
이건 뇌가 보내는 이상 신호일 뿐이야.
나의 잘못이 아니야.
나는 지지 않아.
나는 지지 않아.
나는 지지 않아.
아직도 나를 울리는 한 문장
나.는.지.지.않.아.
*
선배가 떠나고 참 많은 시간이 흘렀다.
선배가 떠난 직후 몇 년 동안은 새해가 되면 동기들과 얼굴도 볼 겸 함께 선배를 만나고 왔는데
각자의 생활이 바빠지고 자연스레 만나는 것이 뜸해지면서 한동안 선배를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고민상담소 조울증 주제를 접하면서 다시 선배와의 추억이 생각났다.
이럴 때만 내 생각한다고 섭섭하다고 하겠지만
선배는 아마 섭섭하다고 말하면서도 얼굴 가득 장난스러운 미소를 띄고 있을 것 같다.
이번에도 저는 선배를 떠올리며 펑펑 울었네요.
도움을 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버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싸움을 했을지를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이 아파요.
다음에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그 때는 선배의 이야기를 더 잘 들어줄께요.
그날까지 부디 따뜻한 곳에서 쉬고 계세요.
정말로, 다시 만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