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엄마의 런닝구

[시] 엄마의 런닝구

 

 

엄마의 런닝구 / 배한권

 

작은 누나가 엄마보고

엄마 런닝구 다 떨어졌다.

한 개 사라 한다.

엄마는 옷 입으마 안 보인다고

떨어졌는걸 그대로 입는다.

 

런닝구 구멍이 콩만하게 

뚫어져 있는 줄 알았는데

대지비만하게 뚫어져 있다.

아버지는 그걸 보고

런닝구를 쭉쭉 쨌다.

 

엄마는

와 이카노.

너무 째마 걸레도 못 한다 한다.

엄마는 새 걸로 갈아입고

째진 런닝구를 보시더니

두 번 더 입을 수 있을 낀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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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1987년 국민학교 6학년 학생이었던 배한권 군이 쓴 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시를 쓴 6학년 어린이가 지금은 나이 쉰 정도의 중년이 되셨겠네요.

지금은 무엇을 하고 계실지, 글은 계속 쓰고 계실지 궁금합니다.

 

이 시가 인터넷을 떠돌며 한창 유행했을 때 저도 우연히 보고

웃으면서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린 소년의 능청스러우면서도 순수한 말투가 귀여워서 웃었고

각자의 방식대로 서로를 사랑하는 가족들의 마음이 느껴져서 울었습니다.

커다란 구멍이 난 런닝구를 입는 어머니의 모습이 어린 아이의 눈에는 조금은 부끄럽게 여겨질 법도 한데

꾸밈없이 담백한 언어로 유쾌하게 풀어낸 이 시가 저는 참 좋더라구요.

*

오늘 직장 동료와 잠시 수다를 떨면서 

주말에 부모님과 함께 나들이 다녀온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면서 대단히 좋은 곳에 모시고 가고 

대단히 비싼 밥을 사드린건 아니더라도

이제는 내가 사드리는 밥을 기분 좋게 드시는 부모님을 보니 

마음이 편하다는 이야기를 했지요.

 

커뮤에서도 몇 번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오랜 기간 저희 집이 굉장히 어려웠었어요.

한국전쟁 직후의 참상을 겪어보지 못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함부로 해도 되나 싶지만

나는 분명 21세기를 살고 있는데, 

마음만은 궁핍했던 그 시절을 살고 있는 느낌이었지요.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날카로웠던 저라서

부모님께 상처도 참 많이 드렸던 것 같아요.

 

몇 해 전 늦은 여름, 부모님과 아이스크림 하나씩 물고 밤산책을 하고 있는데 

아빠가 어려웠던 그 시절, 한 여름에 냉장고가 고장났던 이야기를 하시더라구요.

 

엄마와 저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일이었지요.

아빠가 "그때 시원한 물을 못마시는건 좀 힘들긴 하더라."라고 말씀하시며 웃으시는데

그 모습이 이상하게 좀 귀여워 보이기도 하고 짠하기도 해서 

목구멍이 꽉 막히는 기분이 들었어요. 

눈물도 찔끔 났구요.

그 때 아빠가 웃으시던 모습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지금도 엄청나게 잘 사는건 당연히 아닙니다.

절약이 몸에 시절을 살아오신 분들이라

여전히 야채 값 여기저기 비교하면서 구입하시고요,

갖고 싶은 물건도 세번 네번 고민하며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십니다.

그래도 이제는 딸이 사주는 선물

비싸다며 한사코 거절하시기 보다는 아이처럼 웃으면서 좋아해 주시고

딸이 사주는 한끼 식사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보면

제 마음이 참 편하고 행복해지네요.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이 없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 시절을 지나온 덕분에 우리 가족이 조금 더 단단해지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마키분들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많이 사랑하시고 

아낌없이 표현하시는 밤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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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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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ood luck
    그루잠님 딸인가요 ㅋㅋㅋ 
    왕숟가락  3인분이길래 아들인줄 ㅋㅋㅋㅋ 
    전 저희집 아들입니다
    저도 엄마 아빠 항상 보살펴 드릴려고, 미리미리 불편한것 없는지 하는편이라
    거의 아들대접이네요 ㅋㅋㅋ
    좋은곳 많이 보여드리고, 맛난것 먹고 젤 즐거워 하시는것 같아요 
    부모 맘 다 같아요  자식이 힘들게 번돈으로 콩알을 가져와도 
    대포알만한 사랑이 느껴 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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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루잠
      작성자
      굿럭님은 어머니이자 따님이셔서 엄마의 마음도 딸의 마음도 잘 아시는군요. 
      대단히 크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부모님 마음에 흡족한 사람이 되기는 글른 것 같고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해보려고 합니다.
      재롱 열심히 피우면서 얼굴 자주 보여드리고 좋은 추억 많이 만들어야죠.
      저는 딸인데 멀리 있는 호적메이트 몫까지 하느라 밥을 세그릇씩 먹어야 해요ㅋㅋㅋ 원래 두그릇이 제 몫이고 나머지 한그릇이 호적 메이트 몫입니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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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과 나무
    그루잠님 반갑습니다 ^^
    자신의 삶을 드러낸다는건,
    쉬운 일이 아니라 큰 용기가 필요한듯요^^
    부모님과 아이스크림을 드시며,
    지난날의 추억을 공유하고 공감하며
    걷는 발걸음은 얼마나 산뜻할지, 
    대화의 순간마다 얼마나 행복하셨을지,
    글을 읽기만 하는 저도
    함께 흐뭇해지는 시간이네요~ㅎㅎ
    아이스크림 3개의 비용에,
    정말 비싸고 귀한 행복을 구매하시어,
    부모님께 선물하셨군요^^
    님의 행복 episode 잘 감상했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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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루잠
      작성자
      숲과 나무님 오래간만에 인사드리는 것 같네요.
      어떤 블로거분께서 저 시를 읽으시고 어른이라면 똑같은 상황을 보아도 궁핍한 상황을 부끄러이 여기고 저런 진솔한 글을 쓰지 못했을 것 같은데 아이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그저 가족간의 사랑과 정이였다는 글을 남기신걸 보고 공감이 되어서 저도 용기를 좀 내어보았습니다.
      그날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거닐던 산책길은 참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적당히 따듯한 공기도 좋았고 아이스크림은 달달했구요, 별거 한 것도 없는데 그저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걸으면서 솔직한 이야기를 나눈 시간이 찡하기도 하고 참 행복했습니다.
      숲과 나무님께도 마음을 울리는 행복한 일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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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나비
    런닝구 ㅎㅎ 아주 어릴적 들었던 기억이납니다
    요즘 젊은세대는 절대 모를~아이의눈에 가족의사랑이
    보였기에 아마도 다른 예명으로 계속글을 쓰고있지않을까요 누구에게나 더하고 덜하고의 차이가 있을뿐 시련은
    있는것 같아요 우선,그루잠님의 부모님께 경의를 표합니다 힘든세월 건전하고 건강한 사고를 가진 자제분들로 
    잘 키워내심에👍 사람은 굳이 안보고도 그사람의글만
    보고도 미루어 짐작할수 있으니까요
    좋으신 부모님께 정말 잘 하셔야겠습니다
    잘하고 계시겠지만 ....더 더 더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는  "효도, 탄탄하고 단단한 님의 가족애 와 오래도록~
    건강하게 행복하시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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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루잠
      작성자
      역시 좋은 글을 많이 읽으시는 진나비님이시라 글을 쓴 아이의 마음도 정확하게 읽어주신 것 같네요. 새 런닝구를 사라고 말하는 누나도, 자기 아내가 다 떨어진 런닝구를 입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워 벅벅 찢어버린 아버지도, 내가 갖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조금만 참으면 우리 식구들 맛있는거 한번이라도 더 먹을 수 있겠지 하고 생각하는 어머니도, 모두 사랑이었겠지요.
      저희 가족도, 진나비님댁 가족분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내 가족을 사랑하고 있었구나 생각하다보니 문득 저희 집에 있었던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생각이 났어요. 물론 그 때의 일들로 상처를 주기도, 받기도 했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가족을 지킨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좋은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모님께 잘해야지요. 앞으로 더 잘하겠습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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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븐
    시도 그렇고 그루잠님 글도 그렇고
    무어라고 할말은 머릿속에 멤도는데
    글솜씨가 없어서 정리 안되니 포기 ㅋ
    추천 꾹..누르고 도망갑니다^^;
    그루잠님 같이 우리딸도 잘 자라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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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루잠
      작성자
      저희 엄마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다시 젊어진다고 해도 그 시절로(저의 어린시절) 돌아가고 싶지 않다.... 라고ㅋㅋㅋㅋㅋㅋㅋㅋ 
      저 지금도 이상하지만 그때는 진짜 엄청 이상한 아이였거든요ㅋㅋㅋㅋ 아, 물론 술,담배,학폭,가출 이런 쪽은 아닙니다ㅋㅋㅋㅋ 워낙 갬성이 유별난데다가 얼마 전 mbti에도 썼지만 저는 왕F, 가족들은 왕왕T 들이라 부모님이 늘 쟤는 왜 저럴까 생각하셨대요ㅋㅋㅋㅋ 
      헤븐님의 이쁜 따님도 언젠가는 사춘기 소녀가 될테고 부모님 말을 무지하게 안듣는 때가 올 수도 있겠지만 반드시 선하고 좋은 사람으로 자랄겁니다. 헤븐님이 그런 분이시니까요ㅎㅎㅎ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행복하게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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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밧드(0:01발송)
    부모님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말 실감하며 삽니다
    직장다니랴 애들챙기랴 시댁 친정 양쪽 조소사 다라다니냐 조금은 짜증났던시절도 있었죠
    지금 퇴직도하고 애들도 다커서 경제적이나 맘도 편해졌지만 부모님과 같이 할수없네요
    요양원에 계셔서 말을 한들 통하지않고 메아리져 옵니다
    조금더 엄마가 젊을때 많은시간을 함께 못해 후회합니다
    글 잘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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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루잠
      작성자
      저도 요즘 부모님은 기다려 주지 않으신다는 말이 절실하게 와닿더라구요.
      부모님이 아직 젊으실 때는 내가 경제적으로 자리도 잡아야 하고 결혼이다 육아다 정신없을 때고
      내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고 여유가 생길 때면 부모님이 나이가 드셔서 어디 여행이라도 한번 떠나기가 쉽지 않지요. 
      나중에 돌아보면 너무 후회가 될 것 같아서 저는 지금 최대한 부모님과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합니다. 아마 아무리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낸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후회는 남겠지만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