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그럴 것 같아요 그녀는 뭘 먹을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인 거 같아요
1970년대 서울은 나에게 거대한 촬영장이었다.
주인공은 나였지만 대본은 없었고, 연출도 없었고, 그저 작은 가방 하나 들고 등장한 엑스트라 같은 시작이었다.
갈 곳이 없어 찾아간 고척동 이모 집. 대문 앞에서 한참 서 있다가 초인종을 눌렀다. 그 장면은 지금 떠올려도 영화 첫 컷 같다. 긴장한 얼굴, 배고픈 배, 그래도 어쩐지 포기하지 않는 눈.
이모는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일단 들어와.”
그 한마디는 내 인생 첫 안전지대였다.
작은 방에 짐을 풀며 나는 혼자 웃었다. 그 시절의 나는 계획이 없었고, 그래서 더 솔직했다. 머릿속에는 나중에 보게 될 영화 기생충 속 장면 같은 문장이 떠오른다.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 송강호(기택 역)
하지만 내 현실은 단순했다.
“계획이 없지.” — 송강호(기택 역)
그 시절 나는 계획 대신 버티는 능력이 있었다. 아침마다 신문 채용란을 뒤지고, 면접을 보고, 돌아와 이모 밥을 먹었다. 밥은 늘 따뜻했고 내 미래는 늘 차가웠다. 그래도 살았다. 그게 중요했다.
골목을 걷다 환한 집들을 보면 괜히 철학자가 됐다. 그때 떠올랐던 영화 속 말.
“부자니까 착한 거지.” — 조여정(연교 역)
그때는 씁쓸했지만, 시간이 지나니 알았다.
여유가 사람을 부드럽게 만든다는 걸. 그리고 여유가 없어도 사람은 충분히 따뜻할 수 있다는 것도.
이모 집에서 보낸 1년은 큰 사건은 없었지만 내 인생의 기초 장면이었다. 남의 집 냉장고를 조용히 여는 기술, 불안해도 웃는 법, 그리고 내일을 포기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인생은 계속 이어졌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남편 사업이 무너지는 장면도 나왔다. 장르는 갑자기 코믹에서 재난으로 바뀌었다. 불면, 공황, 눈물… 카메라는 멈추지 않았다.
그때 깨달았다. 인생은 계획대로 찍는 영화가 아니라, 즉흥 촬영에 가깝다는 걸.
그래서 지금의 나는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며 이 말을 붙여본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 속 주인공이 했던 말.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은 거야. 어떤 걸 집게 될지 아무도 모른단다.” — 톰 행크스(포레스트 역)
정말 그랬다.
고척동의 작은 방도, 웃기던 면접도, 무너졌던 시간도, 다시 일어선 지금도 전부 예상 못한 초콜릿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안다.
인생은 큰 성공 하나로 완성되지 않는다.
작고 웃기고, 그때는 힘들었는데 나중엔 이야기되는 장면들로 완성된다.
남의 집에서 1년 살던 여자, 무계획으로 버티던 여자,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난 여자. 그 모든 장면이 이어져 지금의 내가 됐다.
카메라는 아직 돌아가고 있다.
대본은 여전히 없지만, 이제는 안다.
어떤 초콜릿이 나와도 결국 이야기로 남는다는 것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