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공부에 자극이 되는 수 많은 문장들이 있다.
그 중에서 내가 예전에 읽었던
사법고시 합격 수기에 나온 한 문장을 소개하고자 한다.
수기의 주인공인 전효진님은 변호사이자
현재는 공무원 시험을 보는 수험생들을 대상으로
행정법, 헌법을 강의하는 소위 말하는 1타 강사이다.
자신을 뒷바라지 해주시는 어머니를 위해
최대한 빨리 고시공부를 끝낼 수 있도록
집중적이고 독하게 공부를 하여 1년 만에 사법고시에 합격한 것으로 유명한 분이다.
자신의 공부 경험을 모아 쓴 수기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그래도 해라. 실력만 남고 감정은 사라진다.>
*
내가 공부를 계속 하겠다는 말을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모두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공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책상에 앉아 있기 보다는 현장을 뛰는 것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고
늘 나의 전공과는 거리가 먼 곳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다들 스터디 모임에 가입하여 공부를 할 때도
나는 단 한번도 스터디를 해 본 적이 없다.
그러던 내가 갑자기 공부를 계속 하겠다는 말을 한 것이다.
나는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찌 보면 뚜렷한 목표나 계획도 없이
정말 흐릿한 생각만으로 내 인생을 바꾼 그런 엄청난 결심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
나는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다.
그래도 성실하기는 해서 주어진 과제는 미루지 않고 꼬박꼬박 끝내는 편이었다.
밖으로 도는 성격도 아니라서 늘 책상 앞에 앉아 있기는 했지만
사실 앉아 있는 시간 중 절반은 딴 생각을 하면서 보냈다.
중학생 때였나,
과학 선생님이 내 노트 필기를 전교생에게 돌려보게 한 일이 있었다.
그때는 어린 마음에 참 뿌듯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예쁘고 정성스러운 노트 필기 중에
내 머리 속에 남아있는 내용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은
좀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필통이 터질 정도로 색색깔의 펜을 가지고 있었지만
공부를 잘하는 요령도 없고 잘 할 생각도 없는 그저 그런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런 내가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 먹었으니 주변 사람들 모두가 놀랄 만한 일이었다.
*
운이 좋았던건지, 어찌어찌 원하던 연구실에 들어가게 되었다.
머리 좋고 공부 꽤나 한다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연구실에서
나는 돋보이는 존재가 될 수 없었다.
이미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해왔고
공부하는 요령도 잘 알고 있는 친구들도
연구실에 들어온 뒤 자기 자신이 "우주의 먼지"처럼 느껴진다고 했는데
나는 그 먼지의 먼지만큼도 안되는 존재였다.
공부를 하겠다고 연구실에 들어가 놓고는
공부를 계속 하는게 맞는지 고민을 했다.
굳은 결심을 가지고 시작해도 어려운 일을
뚜렷한 목표나 각오도 없이 흐릿한 마음으로 시작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다.
그러던 차에 집안 사정이 급격하게 어려워진 사건이 있었다.
당장 돈을 벌어야 했다.
교수님께 전후 사정을 다 말씀드리자니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아주 짧게 말씀드렸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져서 공부를 중단해야 할 것 같습니다."
교수님은 고개를 돌려 가만히 모니터만 바라보셨다.
"아직 학기가 남았으니 조금 더 생각해보자."
애초에 공부에 미련이 있던 사람이 아니었으니
그만 두는 것도 나쁜 생각은 아니라며 씁쓸한 마음을 달래던 그 날 밤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연구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크진 않아도 매달 월급이 들어갈거야.
힘.들.어.도. 공.부.를. 포.기.하.지.말.아.라"
*
그 날이 내가 공부를 진지하게 대면한 시작한 첫 날이었다.
어떻게든 끝을 보고야 말겠다는 독한 마음을 가지게 된 첫 날.
일단 우선순위를 정해야 했다.
졸업도 급했지만 돈도 만만치 않게 급했다.
1분 1초도 허투루 쓸 수가 없었다.
수업을 들어야 했으니 오후에 출근해도 되는 일을 구했다.
세세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아침 8시에 연구실에 나가서 강의를 듣고 연구원 일을 하고
오후 2시에 출근해서 밤 10시 퇴근.
그리고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에서 새벽 1,2시까지 논문을 서치하고 공부를 했다.
집에 가서 공부를 할 수도 있었지만
집에 가면 너무 졸렸다. 침대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힘들었다.
사무실에서 잠들면 큰일이라는 약간의 긴장감을 가지고 있는 편이
차라리 공부가 더 잘 되었다.
수기에서 전효진님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가방을 들고 바로 나갈 수 있게
전 날 미리 옷도 입고 양말까지 신고 잠을 잤다는데
나는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했다. 그렇게 했으면 나도 변호사 면허를 땄으려나..ㅎㅎ
*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내야 하는 상황에서
나의 계획적인 성격은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원래 목표하는 바가 생기면 아무 생각 없이 묵묵히 하는 편이라
잠 못자고 몸이 바쁜 것은 생각보다 할 만 했다.
정말 힘들었던 시기는
졸업을 위해 회사를 그만두고 졸업에만 매달렸던 마지막 시기였다.
그때는 이동하는 시간도 아까워서
한번 연구실에 나가면 집에 오질 않았고, 집에 가면 연구실에 나오질 않았다.
책상에 앉아 있으면 자꾸 엎어져서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방 귀퉁이에 좌실 테이블, 논문 더미, 탁상 스탠드만 놓고
낮인지 밤인지도 모르고 쪼그리고 앉아서 공부만 했다.
너무 졸리면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서 쪽잠을 잤다.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나서 다시 또 공부.. 공부...
온 몸의 관절이 다 아프고 머리가 터질 것 같아서
눈물이 줄줄 흐르고 짜증이 나는 순간에도
나는 그 자리를 절대 떠나지 않았다.
질질 울면서도 읽고 또 읽고, 쓰고 또 써내려갔다.
*
이 시기는 내 생애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순간 best 3위 안에 드는 순간이다.
전효진님은 '감정은 사라진다'라고 하셨는데
전효진님은 혹시 T성향이 아니신지...
왕 F인 나는 짜증과 절망 그 자체였던 그 순간의 감정이 완전히 잊혀지진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짜증을 내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포기하기엔 나는 이미 너무 많이 왔다.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줄줄 흐르도록 힘들더라도
심사 날짜는 정해져 있었고
나는 나를 믿어주는 사람을 실망시킬 수 없었고
졸업을 하고 돈을 벌어야 했다.
시간이 가는 것이 무서웠지만
한편으론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기다리면서
어두운 방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꾸역꾸역 머리 속에 정보를 쑤셔 넣었다.
머리가 멍하고 하얘져서 더 이상 아무 것도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았는데
억지로 쑤셔 넣은 정보가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 신기했다.
그리고 나는 나름 괜찮은 모양새로 졸업을 맞이했다.
*
나는 지금 그때 울면서 했던 공부를 가지고 밥을 벌어먹고 살고 있다.
위에도 말했듯이 나는 <실력만 남고 감정은 사라진다>고 말한 전효진님과는 달리
그 힘든 상황에서 느꼈던 짜증과 좌절의 감정을 완전히 잊어버리지는 못했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순간이기도 하지만
그 순간은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순간이기도 하고
내 생애 다신 없을 가장 뜨거운 순간이었음은 분명하다.
하루를 치열하게 살아내는 것은 분명히 힘든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묵묵히 앞으로 나아간다면
어느 날 문득 뒤를 돌아보았을 때
내 뒤를 따라오고 있는 '실력'이라는 발자국을 보게 될 것이다.
그래도 해라. 실력만 남고 감정은 사라진다 -전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