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릴 때부터 '책임감이 강하다, 속이 깊다'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어요.
원래 천성이 꼼꼼하고 완벽주의 기질에 어른스러운 면이 있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해내는 편이었죠.
좋은 말로 표현하면 책임감이 강하고, 나쁜 말로 표현하면 융통성이 제로라서
한번 한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지키는 성격이었어요.
제가 둘째인데 어리광쟁이였던 오빠와 성격이 너무 달라서 부모님은 이게 참 신기하셨다고 합니다.
한 배에서 나왔는데 어쩜 이렇게 성격이 다른지 모르겠다면서요.
엄마 말로는 저는 정말 손이 갈 일이 없는 키우기 수월한 아이였다고 하세요.
어릴 때는 이게 저의 장점이라고 생각했어요.
집에서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늘 선생님의 칭찬을 받았고
다른 사람을 잘 챙기고 고민도 잘 들어주는 성격 덕분에 친구들도 저를 좋아했거든요.
친구들은 저를 장난처럼 "엄마"라고 지금도 제 별명은 "ㅇ마미"입니다.
학교 다닐 때는 저의 이런 성격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직장 생활을 하기 시작한 뒤부터는 책임감이 강한 저의 성격이 저를 너무 힘들게 만들기 시작했어요.
예를 들어서 회사에서 작은 문제가 생기면
그게 꼭 제 잘못이 아닌데도, 제가 책임져야 할 상황이 아닌데도
내가 조금 더 신경을 썼다면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요.
회사 일 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힘든 일을 겪으면
제가 어떻게든 해결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듭니다.
어릴 때는 저의 역할이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친구, 어느 학교의 학생, 이 정도였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더 많은 역할을 맡게 되면서
일상의 모든 것이 점점 더 나를 옥죄어 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다른 사람들은 가볍게 넘어갈 일도 저는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머릿속에서는 자꾸 "내가 더 잘했어야 했어, 더 신경 썼어야 했어." 하는 생각만 반복됩니다.
그래서인지 잠자는 시간에도 저는 늘 긴장하면서 살고 있는 것 같아요.
휴일에도 마음 편하게 쉬지를 못해요.
늘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그 일을 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계산하면서 살아요.
업무 뿐만 아니라 내가 편하게 쉬어야 할 집에서도
문제가 생길 가능성을 계속 상상하면서 대비하려고 하고요.
이번 주말은 편하게 쉬어보자 하면서 주말에 할 일을 며칠 전에 미리 끝내 놓아도
집은 늘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청소기와 걸레를 듭니다.
저와 가장 친한 친구의 말로는 저의 집에 오기가 부담스럽대요.
집이 너무 깨끗하고 모든 것이 각이 잡혀 있어서
먼지 한 톨이라도 떨어뜨리면 안될 것 같다고요.
딱히 결벽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쨋든 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제 자리에 놓여서 각을 잡고 있어야 마음이 편합니다.
이런게.. 강박의 일종인거 맞지요?
회사에서도 혹시 실수를 할까 봐 서너 번은 기본으로 확인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는게 무서워서 부탁도 잘 못해요.
어쩔 수 없이 부탁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반드시 신세를 갚아야 마음이 편하고요.
지금 회사에서 오래 일을 했는데
한 번은 저와 친한 동료가
"이 정도 일을 도와주는 건 도와주는 축에도 못 끼는건데 뭘 그리 미안해 해?" 라고 한 적도 있어요.
그 말을 들으니까 마음이 좀 복잡했어요.
의식적으로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이긴 한데, 저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면
늘 그 이상으로 반드시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같아요.
밥 한 번 얻어먹으면 다음에는 꼭 제가 사야 마음이 편하고
누군가 제 일을 조금이라도 대신 해주면
저도 모르게 머릿속으로는 '다음에는 내가 두 배로 도와줘야지' 하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저는 인간관계에서도 제가 손해를 보는 부분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으면서도
제가 다른 사람에게 '빚'을 지는 부분은 견디지를 못하는 것 같았어요.
폐를 끼치면 안되고, 민폐가 되어서는 안되고
누군가 나 때문에 불편해지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요.
적당한 책임감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당연히 필요한 것이죠.
하지만 저는 그 기준이 너무 높은 것 같아요.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완벽해야 하고
늘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말 그대로 전력을 다해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회사 책상은 청소 여사님이 감탄할 정도로 늘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고
냉장고에는 신선한 식료품과 반찬이 오와 열을 맞춰서 정리되어 있어요.
식재료가 상해서 버려지는 일은 저희 집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문제는 이렇게 '해 나가기 위해서' 너무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소비하고
늘 긴장 상태로 살고 있는 저는 점점 지쳐간다는 겁니다.
출근하기 전에 제 자신을 멀끔하게 단장하고 집까지 깔끔하게 정돈하기 위해
새벽 3시에 일어난다면 믿으실 수 있나요?
그만 하면 좋을 텐데, 사실 어떻게 해야 그만 할 수 있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주변 사람들 모두 저에게 스스로를 너무 몰아붙인다며 편하게 하라고 하지만
저는 어떻게 해야 마음이 편해지는 건지도 잘 모르겠어요.
긴장을 풀면 큰 실수를 하게 될 것 같아서 두렵고
한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겉잡을 수 없이 모든 것이 엉망이 될 것 같아서 불안해요.
요즘에는 이런 생각도 듭니다.
저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 실수하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인 것 같다고요.
그래서 사소한 일도 강박적으로 끊임없이 자기 검열을 하게 되고
잘했던 일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고 늘 잘못한 일만 떠올립니다.
남들이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줘도 저는 늘 제가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져요.
저는 제 삶이 너무 피곤합니다.
늘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도 마음은 단 한순간도 편하지 않거든요.
무언가를 내려놓고 싶다가도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이 되어 버릴까봐 겁이 납니다.
혹시 저처럼 과도한 책임감 때문에 스스로를 끊임없이 몰아붙이며 살아가는 분 계실까요?
이런 것도 강박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는 건가요?
어떻게 해야 조금 덜 불안해지고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도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