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는 책을 물려받는 일이 정말 흔한 일이었는데 친가와 외가를 통틀어서 아이라고는 나와 내 혈육 둘 뿐이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정말 많은 책을 물려받았고
선물받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최신 버전의 책부터
삼촌, 이모가 보던 정말 오래된 책까지
많은 종류의 책이 있었다.
또 내가 살던 동네에는 일주일에 한 번 씩 책을 가득 실은 이동 도서관 차량이 방문하곤 했다.
차가 오는 날이면 엄마는 내 손을 붙잡고 이동 도서관 차에 가서 읽고 싶은 책을 고르게 했다.
나는 큼직한 글씨와 그림이 있는 동화책을,
엄마는 깨알만한 글씨가 적힌 두툼한 책을 두 권이나 세 권씩 빌리곤 했다.
책을 빌려온 날이면 엄마와 나는 거실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서 열심히 책을 읽었다.
엄마는 가끔, 아니 솔직히 말하면 자주, 책을 읽다가 잠이 들곤 했다.
고롱고롱 작게 코고는 소리가 참 평화롭게 느껴졌다.
엄마가 잠이 들면
나는 엄마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조용히 책을 읽곤 했다.
지금 내 나이보다 훨씬 어렸던 그때의 엄마는
아이에게 책 읽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자녀의 독서 습관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말을 듣고 열심히 실천했던 것 같다.
안타깝게도 가끔은 노곤노곤하게 몰려오는 잠에게 지고는 했지만...
"아이들은 부모의 무릎 위에서 독자가 된다.
에밀리 부흐발트
사실 나는 한글을 꽤나 늦게 깨우친 편이다.
날 때부터 활발하고 뭐든 빨리 깨우친 영특했던 손 윗 혈육과는 달리
느리고 낮가림도 심한 나를 보면서 엄마는 은근한 초조함을 느꼈으리라.
그런 나에게 독서는 정말 현명한 선택지였다.
혼자 공상하는 것을 좋아했던 나에게 책은 끊임없이 상상력을 자극하게 하였고
나를 늘 새로운 세계로 데려다 주었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글을 깨우치게 되었고
글을 알게 되니까 책 읽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집에 가득 쌓인 동화책, 소설책, 위인전, 백과사전 등등
책을 닥치는대로 읽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책인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도 그 시절에 만나
족히 백번은 넘게 읽었을 것이다.
위인전으로 만난 세계의 위인들은 나에게 인생에 길잡이가 되어 주었고
백과사전으로 만난 하늘과 바다, 우주, 식물과 동물들은
나에게 세상을 넓게 볼 수 있는 시야를 주었다.
책을 읽으면서 나의 세상은 끝없이 넓어졌고
내가 꿈꾸는 세상도 알록달록 다채로운 색깔을 띄기 시작했다.
"내가 세계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책에 의해서였다."
- 장 폴 사르트르 -
작년에 EBS에서 <책맹(冊盲)인류>라는 제목의 10부작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적이 있다.
(꽤 흥미롭게 본 다큐였는데 유튜브에 편집 영상이 올라와 있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꼭 한번 보시기를 추천드린다.)
2021년 조사결과,
우리나라에서 1년간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은 사람의 비율은 52%가 넘는다고 한다.
이는 세계 최하위권 수준이다.
입시에 목숨을 걸고, 초등학교 때부터 각종 독후감에, 독서토론회까지..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독서에 매우 익숙해져 있을 법 한데
어쩌다가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일까?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조사를 살펴보면 20대들이 책을 읽지 않는 이유는
독서가 공부와 입시를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 반 강압에 의해 했던 독서가 지긋지긋하다는 이유였고
그보다 더 높은 연령대는 일이 바빠서, 혹은 집안일, 육아를 하느라 시간이 없어서였고
60, 70대 연령층은 눈이 나빠져서 책에 오래 집중하기가 힘들고
유튜브 같은 영상 컨텐츠를 보는 것이 훨씬 쉽고 재미있어서,
혹은 이 나이에 굳이 책을 읽어서 뭐하나, 하는 생각 때문이라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는데
결국 독서를 하게 되는 시기는 초등학교 때부터 성인이 되기 전까지라니
진정한 독서의 의미에 대해서 한 번쯤은 다시 되집어 볼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책은 청년에게는 음악이 되고,
노인에게는 오락이 된다.
부자일 때는 지식이 되고,
고통스러울 때는 위안이 된다."
-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
나 또한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입시를 준비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독서에 대한 흥미도가 급격하게 떨어졌던 것 같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어릴 때부터 책 읽는 것을 참 좋아했고 글 쓰는 것도 참 좋아했다.
비록 교과서이긴 하지만 책을 읽는 것이 참 좋아서 문학 수업도 좋아했었다.
문학 교과서에는 좋은 시, 좋은 소설이 가득했으니까.
그런데 대학 문턱을 넘으려면
그저 책을 읽고 나의 생각과 느낌을 탐미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글의 감상 초점, 작가의 의도 파악, 글의 성격과 특징 및 구조를 분석하고
그것을 완벽하게 외워야만 했다.
내가 A라고 느꼈어도 해설서에 B라고 되어 있으면 A는 용인되지 않는 오답이었다.
분명 작품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일은 굉장히 흥미롭고 의미있는 일이다.
하지만 완벽한 해설서에 반하는 나의 생각은 입시에서 단 1%도 허용되지 않았다.
미술에서도 "입시미술"이 따로 있는 것처럼
일단 대학의 문턱을 넘기 위해서 나는 이 완벽한 해설서를 달달 외워야만 했고
나의 생각이나 개인적인 의견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몇 년 전 신경림 시인이
자신의 유명한 시 <가난한 사랑 노래>를 가지고 낸 입시 문제를 풀어본 적이 있다.
거기에서 시인은 30점을 받았다고 한다.
10문제를 풀었는데 3문제를 맞힌 것이다.
최승호 시인 또한 자신의 시를 가지고 출제된 수능 문제를 풀어보았는데
단 한 문제도 맞히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 나라 국어 교육과 문학 교육 방향성의 문제점을 꼬집는 씁쓸한 일화가 아닐 수 없다.
"독서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자질구레한 일이나 의무로
느껴지게 해서는 안됩니다.
독서는 선물이어야 합니다."
- 케이트 디카밀로 -
어린 시절 우리 동네에는 작은 서점이 여러 군데 있었다.
친구들과 놀다가도 서점에 들러서 새로 나온 책들을 살펴보기도 하고
참고서를 사러 갔다가 맘에 드는 책을 발견하면 주저앉아서 책을 읽기도 했었는데
요즘은 주변에서 작은 동네 서점을 찾아보기가 정말 어렵다.
온라인 주문도 가능하고 e-book도 편하게 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책은 서점에 가서
직접 만져보고 몇 장 정도는 읽어보고 사고 싶다는 욕심이 있다.
이 또한 책과 멀어진 자의 핑계이기는 하겠지만.
접근성이 좋은 작은 서점은 많이 사라졌지만
요즘은 도서관 시설도 정말 잘 되어 있고 늦은 시간까지도 운영을 하니까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다.
진짜 문제는 이제는 활자 하나에 눈을 둘 시간도 없다고 느끼는
바쁘기만 한 나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얼마 전 커뮤에도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10월이 되면서 나는 모든 OTT 서비스 구독을 중단했다.
물론 드라마와 영화를 보는 것도 좋은 취미 생활이지만
너무 많은 영상의 홍수 속에서 무엇 하나 집중해서 보지 못하고
하루 종일 무엇을 보는게 좋을까 뒤적거리기만 하던 시간이 너무 아깝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유난히 덥고 힘들었던 여름을 보내고
애타게 기다렸던 가을을 만끽해보기 위해 잠시 OTT와의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서랍 깊숙히 넣어둔 책을 꺼냈다.
매주 한 권 씩, 활자에 눈을 두고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읽어가는 중이다.
바쁘고 어지러운 마음을 정리하고 독서로 나의 마음을 다스리며
이 가을을 마음껏 누려보리라.
가을은 누가 뭐래도 책 읽기에 참으로 좋은 계절이니까.
"독서가 정신에 미치는 효과는
운동이 신체에 미치는 효과와 같다."
- 리처드 스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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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진나비
그루잠님께서 올려주신 명언과 님의글 잘 읽었습니다
참 조근조근 부드럽게 설명과느낌을 잘 적어주셨단
생각에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번 독서명언의
주제가 반가웠어요 이번 계기로 쭈~욱, 독서하는 사람이
늘길 그래서 대화가 잘 통했으면 이해심이 넓어졌으면~두루두루 간절히 바랍니다
진짜 좋은 시나 글들을 올리면 외면 당하는 소통이
조금 답답했는데...앞으론 희망을 가져보렵니다
좋은시간들 보내시길요~^^
그루잠
작성자
저도 (한때) 책을 좋아했던 사람이라 이번 주제가 참 반갑더라구요.
한강작가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책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어난 것도 참 반가운 일인데, 이 일을 계기로 몰랐던 출판 시장의 이면을 알게 되었네요.
때로는 공부의 수단이 되기도 하고, 시장 경제의 어두운 면을 보여줄 때도 있지만 어쨋든 독서 그 자체는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지요. 저도 진나비님의 말씀처럼 이 곳이 아름다운 글과 마음을 나누며 소통하는 공간이 되어주길 바랍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