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나르시시스트라는 것이 비정상적으로 과도한 자기애를 가진 사람을 의미하는 줄만 알았어요.
조금 잘난 척 비슷한 것을 하는 친구가 있긴 하지만 웃으면서 넘길 수 있는 정도라서
제 주변에는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이 없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찾아보니까 나르시시즘이라는 것이 꼭 자아를 과대평가하는 특징만을 가진 것은 아니더라고요.
제가 나르시시즘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외현적 나르시시즘이라고 해서 자기 과대성이 두드러진 유형이고
그 외에도 내현적 나르시시즘, 악성 나르시시즘, 공동체적 나르시시즘, 취약형 나르시시즘 등,
다양한 형태의 나르시시즘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조금 놀랐습니다.
그 중에서도 자기 과대성을 충족하기 위해 타인을 이용하고 규율을 무시하며 파괴적인 성향을 보인다는
악성 나르시시즘에 눈길이 머물렀어요.
그리고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었죠.
바로 제가 회사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상사 분이었죠..
저는 지금 회사에 경력직으로 입사했고, 그 분을 처음 뵈었을 때는 그냥 성격이 좀 까다롭고 까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분은 저보다 높은 직급이신데 저의 기준으로 봤을 때 그 분은 일을 잘하는 후배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어요.
저라면 이 정도의 성과를 낸 후배라면 칭찬 한 마디라도 해줬을 법 한데 말이죠,
그 대신 가볍게 한 마디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아주 사소한 실수를 한 사람에게는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집요하게 지적하는 것 같았어요.
다행히 저는 그 분의 후배도, 같은 프로젝트를 하는 사람도 아니지만
밖에서 보아도 그 분은 항상 본인이 옳아야 하고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인정받는 것을 굉장히 불편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어떤 프로젝트를 잘 마무리해서 다른 부서에서도 칭찬을 받은 적이 있어요.
그 날은 별 말 없이 넘어갔는데
어느 날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갑자기 제 프로젝트를 거론하며
"그거 별거 아닌데?" 이런 식으로 말하더라고요.
순간 굉장히 불쾌했지만, 다 같이 모인 자리라 표정 관리를 하려고 애쓰고 있는데
"요즘 OO씨, 자신감이 넘쳐요~ 좋아보이는데요?" 라고 투 펀치를 날리더라고요.
요즘 똑같은 문장을 칭찬하는 느낌으로, 비꼬는 느낌으로, 화내는 느낌으로 표현하는 것이 유행인 것 아시죠?
뭐 문장만 곧이 곧대로 들으면 칭찬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 날의 뉘앙스는 완전한 비꼼이었거든요.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너무 열받는데, 그 이후로 그 분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해보니까
안 건드리는 게 나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자기 성미를 건드린 사람은 정말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괴롭힐 사람이더라고요.
붙을 수야 있겠지만 사람들과 싸우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저의 성격 상,
그 분과 붙으면 저는 정말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 자명한 사실이었어요.
그 분은 다른 사람이 좋은 평가를 받으면 꼭 한 마디씩 해서 어떻게든 깎아내리고야 말아요.
그리고 다른 사람이 실수라도 하면 난리가 납니다.
"이런 것도 제대로 못하면 어떡하냐, 나 같으면 얼굴도 못 들고 다닐거다." 등등의 모욕에 가까운 말을 서슴없이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하죠.
그리고 본인이 지시한 업무에 문제가 생기면 "제가 언제 그렇게 하라고 했나요?" 라고 하고
메일이나 메신저 내용을 보여주면 "그건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요."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설명이라도 할라치면 "왜 그렇게 융통성이 없냐,"라고 하지요.
결국 어떤 상황에서도 본인은 잘못이 1도 없는 사람이 됩니다.
자신의 팀원이 일을 잘하면 본인이 잘 가르치는 능력있는 사람이라 그런 것이고
일이 잘못되면 부하 직원이 능력 없는 사람이라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제가 볼 때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굉장히 교묘한 것 같아요.
욕을 하거나 심한 말을 하는 것보다 더 기분 나쁘게 사람을 깎아 내리죠.
예를 들어서 다 같이 있는 자리에서 자기 부하 직원을 두고
"우리 OO씨는 아직 아무 것도 몰라서 제가 하나하나 다 가르쳐줘야 해요" 라고 합니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부하 직원을 잘 챙기는 친절한 상사처럼 들리겠지만
이 또한 자신은 올려치고, 상대방은 내려치는 기술이죠.
그리고 누가 자신의 의견에 반박이라도 하면
웃으면서 "나는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닌데 왜 그렇게 생각했어요?"라고 하며
상대방이 예민한 사람인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기 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관대할 수가 없어요.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고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에게는 더 할 나위 없이 친절합니다.
하지만 그 직원이 퇴사라도 하면 태도가 180도 돌변합니다.
원래 문제가 많았던 사람이라느니, 자신이 챙겨주지 않았으면 더 빨리 나갔을거라느니...
회사에 있을 때는 누구보다 믿음직하고 일 잘하는 직원이라고 해놓고
퇴사를 했다고 최악의 직원으로 평가하죠.
아마도 퇴사하는 것 까지도 자신을 배신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처음 입사했을 때는 그 사람의 말을 다 믿었던 것 같아요.
일단 그 분은 굉장히 친절하고 선한 이미지를 가지고 계시거든요.
그러다가 주변 사람들이 조금씩 흘리는 말과, 저에게 쏜 원투펀치를 맞고 난 뒤
조심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지요.
친구라면 손절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직장에서 매일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관계의 특성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그 사람을 변화 시킬 수도 없잖아요.
그래서 저는 그 사람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일단 그 사람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누군가가 자신을 비난하거나 지적하는 말을 들을 때면 내가 부족한 것은 아닌지 고민하게 되잖아요?
물론 필요한 지적은 받아들이고 개선하는 것이 맞지만
때로는 나의 잘못이 아닌데도 그 사람이 만들어 놓은 기준 안에서 나를 평가하게 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바로 내가 흔들리게 되는 순간이지요.
사실 저는 기가 쎈 사람이 아니에요. 마음도 약하고 다른 사람의 시선에도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히려 이 사람 덕분에 저를 지키는 방법을 알게 된 것 같아요.
세상을 살다 보면 "어쩌라고"의 마인드가 필요한 순간이 있는데
제가 그 마인드를 갖게 된 것의 절대적인 지분이 바로 이 사람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정말 제가 잘못한 일이라면 고쳐야지요.
하지만 근거 없는 비난, 자존감까지 건드리는 말까지는 굳이 받아들일 필요가 없지요.
저는 극 F 성향인데 이 사람에게는 절대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업무적으로 얽힐 일이 생기면 말보다는 무조건 기록을 남기고요.
아무리 감정을 건드리는 말을 해도 최소한 그 사람 앞에서는 절대로 반응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덕분에 그 분이 저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벽이랑 이야기하는 줄 알았다." 라고 했다는 말까지 들었네요.
아무렴 어떻습니까. 그 분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저를 그렇게 평가하지 않고 있고
무엇보다 제 스스로가 저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니 그 분과의 관계에서 자연스럽게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고
그 사람의 평가가 내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나르시시즘 성향을 가진 사람과 오래 지내다 보면 자신이 이상한 사람인지 헷갈릴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혼자 판단하지 않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이 나를 평가하는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말은 제가 그 팀에 들어간 신입에게도 해 준 말이기도 한데요.
때로는 누군가의 말이 세상에 전부인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한 사람의 평가가 자신의 능력과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아니라
내가 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일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