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급 심사가 있기 전 2년 동안 저는 회사에 거의 모든 것을 걸고 살았습니다. 출근 시간보다 한참 일찍 회사에 도착했고, 퇴근 후에도 업무 메신저와 이메일을 확인했습니다. 휴가를 내도 팀에서 전화가 오면 바로 받았고, 급한 자료 수정 요청이 오면 밤에도 노트북을 켰습니다. “이번 진급만 되면 좀 쉬자.” 그 말이 제 생활의 유일한 목표처럼 됐습니다.
팀에서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하는 일도 많이 맡았습니다. 일정이 꼬이거나 문제가 생기면 결국 제게 오는 경우가 많았고, 저는 그것을 인정받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야근도 마다하지 않았고, 누가 부탁하면 웬만하면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제 실적과 책임감이면 이번에는 충분히 진급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회사 생활을 아예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사람들과 일부러 마찰을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단순히 “일을 잘하면 결과로 인정받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집에 와서도 완전히 쉴 수는 없었습니다. 초등학생 아들의 수학, 영어, 과학, 사회 공부를 챙겼습니다. 평일 저녁이면 숙제를 같이 보고, 시험 기간에는 문제집을 풀며 틀린 부분을 설명해 줬습니다. 피곤해서 그냥 쉬고 싶은 날도 있었지만, 아들이 “아빠 이거 모르겠어”라고 하면 대충 넘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회사에서는 믿음직한 직원이 되고 싶었고, 집에서는 아이 공부를 외면하지 않는 아빠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살면서 주말도 제대로 쉬지 못했습니다. 토요일 오전에는 밀린 업무를 조금 처리하고, 오후에는 아이 공부를 봐주고, 일요일 저녁에는 다음 주 회의 자료와 업무 일정을 확인했습니다. 아내가 같이 산책이라도 하자고 하면 “이번 달만 지나면”이라고 미루곤 했습니다. 당시에는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가족과 같은 공간에 있어도 제 마음은 늘 회사에 가 있었습니다.
진급 발표 날, 제 이름은 없었습니다. 대신 진급한 사람은 제가 보기에는 업무 능력이나 책임감 면에서 저보다 부족하다고 느꼈던 동료였습니다. 상사에게 살갑게 대하고, 회식이나 사적인 자리에 빠지지 않으며 분위기를 잘 맞추던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저도 사회생활을 전혀 못 한 건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일의 결과와 실적으로 평가받을 거라고 믿었고, 그 믿음이 너무 단순했던 것 같습니다.
발표가 난 순간 화가 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화보다 먼저 공허함이 왔습니다. “내가 지난 2년 동안 이렇게 살았는데, 결국 이게 뭐지?”라는 생각만 반복됐습니다. 진급한 동료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하면서도 제 목소리가 낯설었습니다. 그날 집에 돌아와 아들이 수학 문제를 들고 왔는데, 평소 같으면 앉아서 설명해 줬을 문제를 한참 보다가 “오늘은 엄마한테 물어봐”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이 서운한 표정을 지었는데도 그 순간에는 미안하다는 감정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 후부터 제가 이상해졌습니다. 출근길에는 회사 건물이 보이기 전부터 가슴이 답답했고, 사무실에 앉아도 메일을 열기가 싫었습니다. 전에는 빠르게 처리하던 문서를 몇 번씩 다시 읽어도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누가 일을 부탁하면 속으로 짜증이 났고, 친한 동료가 말을 걸어도 대답하기가 귀찮았습니다. 집에 오면 씻지도 못한 채 소파에 누워 휴대폰만 보다가 잠들었습니다. 주말 내내 누워 있어도 월요일이 가까워지면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아내와의 관계도 나빠졌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힘들어 보인다며 걱정해 줬습니다. 그런데 저는 “나도 힘들다”, “집에서는 좀 조용히 있게 해달라”는 식으로 날카롭게 반응했습니다. 아들이 공부하다 실수하면 예전보다 쉽게 목소리가 커졌고, 그러고 나면 아이에게 미안해서 더 말이 없어졌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당신이 회사에서 힘든 건 알겠는데, 집에서도 우리를 밀어내면 우리는 어떻게 하냐”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도 바로 미안하다고 하지 못했습니다. 당시에는 제가 제일 억울하고 힘든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내가 회사에서 지원하는 심리상담 프로그램을 알아보고 예약을 잡아줬습니다. 처음에는 상담까지 받아야 하나 싶었습니다. 내가 약해서 못 버티는 사람처럼 느껴졌고, 낯선 사람 앞에서 회사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상담실에서 “진급이 안 돼서 힘든 게 아니라, 그 2년이 통째로 부정당한 것 같다”고 말하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났습니다.
상담 선생님은 제게 “진급이 안 된 날부터 힘들었던 걸까요, 아니면 그전부터 이미 지쳐 있었던 걸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바로 대답을 못 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진급 발표 전에도 퇴근길 지하철에서 멍하니 앉아 있던 날이 많았고, 아들이 문제를 물어보면 설명해 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다음 날 회의 자료를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늘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팀에서 급한 일을 부탁하면 거절하지 못했고, 집에서도 아이 공부를 대충 봐주는 아빠가 되기 싫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진급에서 떨어지고 나니, 버티던 힘이 한꺼번에 빠져버렸습니다. 회사에서는 누구와도 말하기 싫었고, 집에서는 아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제가 진급 탈락 하나로 갑자기 망가진 게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조금씩 닳아가고 있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상담 선생님은 당장 회사를 그만두거나 상사를 찾아가 감정을 쏟아내기보다, 우선 생활 리듬부터 되찾아 보자고 했습니다. 저는 퇴근 후 업무 메신저 알림을 껐습니다. 처음에는 불안해서 몇 번이나 휴대폰을 확인했지만, 정해 둔 시간 외에는 업무 내용을 보지 않으려 했습니다. 아들 공부도 모든 과목을 완벽하게 봐주려 하지 않고, 하루에 한 과목만 같이 보기로 했습니다. 아이에게도 “아빠가 요즘 좀 피곤해서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내에게는 늦었지만 사과했습니다. “회사 때문에 힘들다는 이유로 당신과 아이에게 화풀이한 것 같다. 당신이 걱정해 줬는데도 밀어냈다”고 말했습니다. 아내는 바로 괜찮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신 앞으로는 힘들면 혼자 참지 말고 말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 뒤로 아내와는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회사 이야기를 하지 않고 산책하거나 식사하는 시간을 만들었습니다.
상담을 몇 번 받은 뒤, 감정적으로 터지지 않고 대화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상사에게 따로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왜 저를 진급시키지 않았습니까”라고 따지기보다, 제가 지난 2년 동안 맡았던 업무와 노력, 그리고 평가 결과를 받아들이며 느낀 아쉬움을 차분히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음 평가를 위해 제가 보완해야 할 점을 구체적으로 알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상사는 제가 일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인 것은 맞지만, 너무 혼자 감당하는 편이고 성과를 공유하거나 도움을 요청하는 부분은 부족해 보였다고 말했습니다. 솔직히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막연하게 “나는 일 못 하는 사람에게 밀렸다”는 생각만 하던 때보다, 제가 바꿀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알게 됐습니다. 그 대화 이후로는 회사에 대한 분노가 조금 줄었고, 제 방식만 옳다고 믿었던 마음도 돌아보게 됐습니다.
지금도 진급에서 떨어진 일이 완전히 괜찮아진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더 이상 회사가 제 인생 전체를 결정하게 두지는 않으려 합니다. 아들과 문제집을 풀 때도 진도를 다 나가는 것보다 함께 웃으며 공부하는 시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아내가 산책하자고 하면 “다음에”라고 미루기보다 가능하면 같이 나갑니다.
번아웃을 겪고 나서 알게 된 건, 끝까지 버티는 것만이 성실함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너무 지치기 전에 멈추고, 도움을 요청하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말하는 것도 책임감이라는 것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저와 비슷한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시겠다면. 이렇게 시작해보세요.
1. 퇴근 후에는 업무 메신저 알림부터 꺼보세요. 처음엔 불안해도 며칠 지나면 조금씩 편해져요.
2. 모든 걸 완벽하게 해내려 하지 말고, 하루에 하나씩만 제대로 하자고 기준을 낮춰보세요.
3. 힘들다는 말을 가족에게 먼저 꺼내보세요. "요즘 좀 지쳤다"는 그 한마디가 생각보다 큰 문을 열어줍니다.
4. 혼자 감당이 안 될 땐 회사 심리상담 프로그램이나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방법이에요. 상담이 약해서 받는 게 아니라,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도와주는 도구예요. 그리고 여유가 생기면 상사나 동료에게 그동안의 노력과 아쉬움을 차분히 얘기해보세요. 감정을 쏟아내는 게 아니라, 앞으로 뭘 바꿀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물어보는 대화로요.
작은 것부터 하나씩 바꿔가다 보면, 버티는 것 말고도 다른 방법이 있다는 걸 느끼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