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렇게 마음속 깊은 곳에 꽁꽁 숨겨두었던 해묵은 고민을 조심스럽게 꺼내보아요. 저는 평생을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어서 정작 제 자신은 까맣게 타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살아온 60대 중반의 늙은 여자예요.
어릴 때부터 형제 많은 집안의 맏딸로 자라면서 늘 양보하고 희생하는 게 당연한 미덕이라고 배우며 컸어요. 동생들 챙기고 부모님 일 돕고 나중에는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까지 하면서 제 삶의 중심에는 언제나 제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있었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제 감정이나 제 상황보다는 남의 기분과 편의를 먼저 살피는 게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버렸더라고요. 젊을 때는 체력이라도 뒷받침이 되니까 밤을 새워서라도 남의 부탁을 들어주고 무리해서 다 감당을 했는데 이제 이 나이가 되고 보니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쳐서 제 삶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들어요.
요즘 들어 가장 저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건 바로 주변 사람들의 무리한 부탁을 단호하게 끊어내지 못하는 제 바보 같은 성격이에요. 지인들이나 모임 사람들 심지어는 친척들이 저에게 곤란한 부탁을 해올 때마다 속으로는 정말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입으로는 어느새 알겠다고 대답해버리고 말아요. 예를 들면 동네 친목 모임이나 종교 모임에서 다들 번거로워서 기피하는 궂은일이 생길 때 누군가 저를 빤히 쳐다보며 부탁하면 그 어색해지는 분위기를 도저히 견디지를 못하겠어요.
결국 제가 또 총대를 메고 하겠다고 나서게 되고 오랫동안 알고 지낸 이웃들이 본인들이 해야 할 귀찮은 일까지 슬쩍 떠넘길 때도 싫은 내색 한 번을 못 해요. 제 경제적인 상황도 여유롭지 않고 요새는 무릎 관절도 안 좋아서 매주 병원에 다니는 처지인데도 그 순간에 안 된다고 거절해서 상대방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게 저는 죽기보다 두려워요.
결국 이렇게 남들이 미뤄둔 짐까지 제 어깨에 겹겹이 짊어지고 혼자 끙끙 앓는 일이 수십 년째 매일같이 반복되고 있어요. 남들 앞에서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다 들어주겠다고 해놓고 텅 빈 집에 돌아오면 억울해서 남몰래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물 흘린 적이 셀 수조차 없이 많아요. 겉으로는 호인이라는 소리를 들을지 몰라도 제 속은 이미 숯검정처럼 새까맣게 타버려서 재만 남은 기분이에요.
남편과 자식들은 도대체 왜 그렇게 바보같이 당하고만 사냐고 화를 내고 핀잔을 주더라고요. 엄마는 자존심도 없냐고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두라고 소리를 칠 때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져요. 저를 위하는 말인 줄 뻔히 알면서도 그 뾰족한 말을 들을 때마다 제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초라하게 느껴져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요.
상대방은 아마 별생각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던진 부탁일 텐데 저는 그 약속을 지켜내느라 며칠 밤낮을 전전긍긍하며 밥도 제대로 못 넘겨요. 행여나 제가 실수를 해서 그 사람 일을 망치면 어쩌나 하는 쓸데없는 걱정까지 사서 하느라 제 금쪽같은 시간과 늙어가는 에너지를 바닥까지 다 쏟아붓고 있더라고요. 내가 내 무덤을 파고 있구나 싶으면서도 멈추질 못해요.
이렇게 계속 살다가는 제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저는 한 번도 제 목소리를 내보지 못하고 끝날 것 같아요. 평생 남들 뒤치다꺼리만 하다가 죽을 것 같아서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덜컥 겁이 나고 서러워져요. 물론 이 지긋지긋한 성격을 고쳐보려고 저 혼자서 발버둥도 참 많이 쳐보고 별별 노력도 다 해봤어요.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심리 상담 프로그램이나 강연 같은 것도 빼놓지 않고 챙겨 보고 자존감 높이는 책들도 사서 수십 번씩 읽어보기도 했어요. 그런 좋은 말씀들을 들을 때마다 그래 나도 이제는 거절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지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혼자 화장대 거울 앞에서 거절하는 연습도 참 많이 했어요. 이번 모임에 나가면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절대 넘어가지 말아야겠다고 속으로 대사를 수백 번 외우기도 했고요.
그런데 막상 제 앞에 상대방이 마주 앉아 있고 저를 치켜세우며 아쉬운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하면 그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려요.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 집에서 연습했던 멋진 거절의 말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또다시 제 입에서는 네 그렇게 할게요 라는 말이 나와버려요.
한 번은 정말 평생 쓸 용기를 다 쥐어짜 내서 웃는 얼굴로 완곡하게 거절의 뜻을 내비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상대방의 웃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지는 걸 보는 순간 제가 무슨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극심한 공포에 빠져버렸어요. 그 찰나의 짧은 침묵과 싸늘하고 어색한 공기를 제가 도저히 감당하고 견디지를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몇 초 지나지도 않아서 제가 먼저 횡설수설 말을 주워 담으며 그냥 제가 시간 내서 해드릴게요 하고 다시 짐을 떠안고 말았어요. 그날 모임이 끝나고 캄캄한 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데 어찌나 제 자신이 밉고 원망스럽던지 길거리 한복판에서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싶더라고요.
때로는 부탁을 할 것 같은 상대방의 전화가 오면 안 받아보려고 억지로 참아본 적도 있어요. 그런데 전화기가 조용해지고 나면 혹시 그 사람이 나를 매정하다고 욕하면 어쩌나 오만가지 상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결국 제가 먼저 그 밤에 다시 전화를 걸어 부탁을 다 들어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에요. 이렇게 혼자 힘으로는 이 깊고 어두운 늪에서 빠져나오는 게 도저히 불가능하게만 느껴져서 매일매일이 절망스러워요.
그래서 용기 내어 질문을 남겨보아요. 제가 가장 먼저 알고 싶은 건 거절을 하고 났을 때 밀려오는 그 숨 막히는 죄책감과 불안감을 도대체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그 마음의 평안을 찾는 방법이에요. 제 사정 때문에 못 한다고 말하는 거절은 절대 나쁜 게 아니라고 머리로는 백 번 천 번 이해를 해요. 그런데 남의 부탁을 거절하는 순간 제가 아주 이기적이고 매정한 사람이 되는 것 같고 그 결과로 결국 제 곁에 아무도 남지 않고 외톨이가 될까 봐 정말이지 너무 무서워요. 이런 제 오래되고 삐뚤어진 마음의 뿌리를 어떻게 하면 건강하고 단단하게 바꿔나갈 수 있을지 절실하게 알고 싶어요.
그리고 현실적인 상황에서 도대체 어떻게 입을 떼고 말을 꺼내야 할지 구체적이고 실전적인 대화 방법을 진심으로 알고 싶어요. 막상 상황이 닥치면 자꾸 구차한 변명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게 되니까 나중에는 제 말의 꼬임에 제가 스스로 넘어가서 빠져나갈 구멍을 잃게 되더라고요. 오랫동안 쌓아온 관계를 완전히 망치지 않으면서도 부드럽지만 아주 단호하게 제 거절의 뜻을 전하는 그런 지혜로운 말하기 기술이 있을까요.
저도 이제 육십 대 중반을 바라보고 있는데 더 늦기 전에 이제는 남의 시선과 평가에 얽매이지 않고 제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며 진정으로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착한 사람으로 기억되기보다는 제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당당한 사람으로 남은 생을 살아가고 싶으니 오랜 세월 굳어진 제 단단한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도록 따뜻하고 현실적인 조언을 꼭 부탁드려요. 두서없이 긴 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