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직장과 현장에서 일만 하며 살았습니다.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녹초가 되어 들어오는 게 당연한 일상이었으니까요...
그 시절에는 가족들 배 안 곯게 하고 남들만큼 입히고 가르치면 애비로서 남편으로서 제 도리를 다하는 거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퇴직하고 나면 마누라랑 오순도순 여행도 다니고 집에서 편안하게 쉴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은퇴를 하고 하루 종일 집에 있게 되니 편안하기는커녕 숨이 턱턱 막힙니다.
평생 밖에서 일 얘기, 남 얘기만 하고 살았지 정작 내 식구랑 일상적인 수다를 떠는 법은 배운 적이 없더라고요.
자식들은 다 커서 제 살림 차려 나가고 덩그러니 거실에 아내와 단둘이 남겨졌는데, 하루 종일 얼굴을 맞대고 있는 그 어색함이 말도 못 합니다.
아내는 소파 한쪽에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저는 반대편에 앉아 애꿎은 리모컨만 만지작거립니다.
적막이 흐르는 거실에 앉아 있으면 자리가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머릿속은 하얗고, 괜히 헛기침 한 번 하고 베란다로 나가서 화초에 물이나 찔끔 주다가 들어오는 게 제 하루 일과입니다.
가끔은 이 침묵을 깨보려고 저도 나름대로 용기를 내서 말을 걸어봅니다.
그런데 평생 무뚝뚝하게 살아온 버릇이 어디 안 가는지, 입 밖으로 나오는 소리라곤 "밥은 먹었어?", "저녁엔 뭐 해 먹을까?" 같은 뻔한 소리 아니면 쓸데없는 잔소리뿐입니다.
아내도 처음엔 몇 번 대답을 해주다가 제가 자꾸 엉뚱하게 말꼬리를 잡거나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니 이제는 아예 귀찮은지 입을 닫아버리더라고요.
사실 속마음은 그게 아닌데 말입니다. '오늘 하루 어땠냐', '요즘 무릎 아픈 데는 좀 어떠냐' 다정하게 묻고 싶은데, 막상 입을 떼면 괜히 쑥스럽고 어색하니 목소리만 퉁명스럽게 나갑니다.
며칠 전에는 텔레비전 뉴스 보다가 별것도 아닌 걸로 제 주장을 펼치며 언성을 높였는데, 아내가 "당신은 평생 남의 말은 들을 줄도 모르고 자기 고집만 맞다고 우기냐"며 안방으로 팩 들어가 버리더군요.
닫힌 방문을 보면서 아차 싶었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자존심 때문인지 입 안에서만 맴돌 뿐 밖으로 나오질 않았습니다.
아내 입장에서도 참 답답하고 속이 터질 겁니다. 평생 저 없는 집에서 혼자 애들 키우고 집안일 하며 나름대로 자유롭게 살았는데, 갑자기 말도 안 통하고 고집만 센 늙은 남편이 하루 세끼 꼬박꼬박 집에서 밥을 차려 달라고 하니 얼마나 짐스러울까요.
그걸 알면서도 저도 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니 자꾸 밖으로만 겉돌게 됩니다. 할 일도 없으면서 괜히 동네 공원 한 바퀴 돌고 오고, 슈퍼에 가서 살 것도 없는데 기웃거리다가 들어오곤 합니다.
나이 먹고 부부 사이에 대화가 단절되니 세상에서 가장 편해야 할 집이라는 공간이 쉴 곳이 아니라 서로 눈치만 보는 감옥처럼 느껴집니다.
남은 인생을 이렇게 데면데면하고 불편하게 살다가 끝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젊을 때 고생시킨 아내한테 늙어서까지 숨 막히는 짐짝 취급받고 싶지 않은데, 평생 굳어버린 제 성격과 화법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도 없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입니다.
저처럼 대화하는 법을 전혀 모르는 무뚝뚝한 늙은이가 아내에게 다가가려면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합니까?
억지로 없는 애교를 부릴 수도 없고, 갑자기 안 하던 다정한 척을 하는 것도 서로 징그러울 텐데 말입니다.
너무 늦기 전에 부부 사이의 이 숨 막히는 어색함을 풀고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늙어갈 수 있는 현실적인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