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을 하루같이 새벽 다섯 시 반이면 어김없이 눈이 떠집니다. 출근할 곳도 없고 저를 재촉하는 알람 소리도 없는데 제 몸은 아직도 과거의 치열했던 아침에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 습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오면 식구들이 모두 잠든 고요하고 적막한 집안 공기가 저를 무겁게 짓누릅니다. 예전 같았으면 서둘러 세수를 하고 와이셔츠 단추를 꿰며 그날 해야 할 업무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느라 이 고요함을 느낄 새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창밖으로 서서히 밝아오는 아침 해를 바라보며 오늘 하루는 또 어떻게 버텨내야 하나 하는 무거운 한숨부터 내쉬게 됩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뼈저린 사실을 마주하는 것이 하루의 시작을 잿빛으로 물들게 만듭니다.
은퇴를 하고 직장이라는 튼튼한 울타리에서 벗어난 지 벌써 꽤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처음 사직서를 내고 짐을 정리해 집으로 돌아오던 날에는 시원섭섭하면서도 이제야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는 묘한 해방감도 있었습니다. 평생 제 이름 석 자 앞에 붙어 있던 직함과 번듯한 명함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익숙해질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하루이틀 시간이 흐르고 끊임없이 울려대던 제 휴대전화가 고장 난 것처럼 침묵을 지키기 시작하면서 제 존재 자체가 세상에서 영영 지워져 버린 것 같은 끔찍한 착각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평생을 입고 있던 사회적 역할이라는 두꺼운 외투를 벗고 나니 그 안에 남은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벌거벗고 초라한 진짜 제 모습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제 이삼십 대와 사십 대 그리고 오십 대의 시간들은 오로지 가족이라는 두 글자를 위해 제 모든 피와 땀을 갈아 넣은 맹렬한 시간이었습니다. 직장에서 상사의 부당한 지시나 거래처의 모욕적인 언사에도 사랑하는 아내와 쑥쑥 커가는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속으로 피눈물을 삼키고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몸이 부서지게 아픈 날에도 하루를 쉬면 가족들의 생계가 흔들릴까 두려워 약국에서 산 진통제를 한 움큼 털어 넣고 만원 지하철에 몸을 실었습니다.
오직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내 집 마련과 아이들의 대학 등록금 그리고 번듯한 결혼 자금을 마련하는 것만이 제 인생의 유일하고도 가장 숭고한 목표이자 자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뼈를 깎는 고통을 인내하며 튼튼한 성을 쌓아 올리고 있다고 믿었는데 막상 완공된 그 성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정작 제가 쉴 수 있는 따뜻한 방 한 칸 없이 텅 빈 폐허만 남겨져 있는 기분입니다.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온 보상으로 남부럽지 않은 집도 장만하고 아이들도 모두 제 몫을 다하는 어른으로 번듯하게 키워냈으니 이제는 두 다리 뻗고 편안하게 여생을 즐기면 될 줄 알았습니다. 텔레비전이나 책에서 말하는 찬란하고 여유로운 제2의 인생이 자연스럽게 제게도 찾아올 것이라 순진하게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평생을 누군가를 책임지고 부양하는 기계처럼 살아온 저에게 즐거움이나 여유라는 단어는 완전히 고장 나버린 외국어처럼 낯설고 해독할 수 없는 영역이었습니다. 제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주말에 푹 쉬면서 즐길 수 있는 취미가 무엇인지조차 스스로 대답하지 못하는 제 자신을 발견하고는 말문이 막혔습니다. 평생 타인의 기대와 가족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만 살아오다 보니 정작 내면의 나를 돌보고 가꾸는 방법은 완벽하게 잊어버린 껍데기만 남은 삶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답답함을 견디다 못해 혼자서 나름대로 돌파구를 찾아보려고 밖으로 겉돌며 참 많은 시도를 해보았습니다. 주변에서 퇴직하면 등산이 최고라고들 하길래 비싼 등산복과 장비를 잔뜩 사들여 매주 유명하다는 산을 무작정 오르기도 했습니다. 구청이나 주민 센터에서 열리는 문화 교실에 등록해서 서예도 배워보고 낯선 사람들과 어울려 탁구도 쳐보았습니다. 하지만 산 정상에 올라 발아래 펼쳐진 풍경을 내려다보아도 가슴이 뻥 뚫리기는커녕 도대체 내가 왜 이 힘든 산을 땀 흘리며 오르고 있는지 근본적인 회의감만 밀려왔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려 억지로 웃고 떠드는 시간도 그 순간이 지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감당할 수 없는 더 큰 공허함과 씁쓸함으로 제 목을 조여왔습니다.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즐거움 없이 그저 불안한 마음을 잊기 위해 남들이 하는 것을 영혼 없이 따라 하는 행동들은 텅 빈 제 가슴에 아주 작은 위안조차 되지 못했습니다.
밖에서 채우지 못한 허전함을 집 안에서 가족들과의 시간으로 채워보려 했지만 그마저도 제 마음처럼 쉽지가 않았습니다. 아내는 이미 오랜 세월 동안 동네 친구들이나 취미 모임을 통해 자기만의 단단하고 즐거운 세계를 구축해 놓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외출하고 없는 텅 빈 거실에서 텔레비전 채널만 수백 번 돌리며 시간을 죽이다 보면 제가 이 집에서 철저하게 이방인이 된 것 같은 소외감이 밀려옵니다.
주말에 아이들이 찾아와도 반가움은 잠시뿐이고 밥술을 뜨고 나면 각자의 휴대전화만 들여다보거나 일찍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 바쁩니다. 평생 일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들과 여행 한번 제대로 가보지 못하고 살가운 대화조차 나누지 못했던 업보가 지금 이렇게 철저한 단절로 돌아오는 것 같아 가슴이 미어집니다. 가족이라는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도록 평생 제 몸을 썩혀 거름이 되어 주었는데 이제 와서 그 그늘 아래 제가 쉴 자리는 한 뼘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야속하고 서글픕니다.
가장 두렵고 저 자신조차 당혹스러운 것은 예고 없이 불쑥불쑥 찾아오는 감정의 무너짐입니다. 평온하게 소파에 앉아 가벼운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며 남들처럼 웃고 있다가도 갑자기 가슴 한가운데서 주체할 수 없는 뜨거운 덩어리가 울컥 치밀어 올라 눈물이 왈칵 쏟아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내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토록 아등바등 살아왔나 남들처럼 도박을 한 것도 아니고 허튼짓을 한 것도 없이 그저 성실하게 가족만 보고 살았는데 왜 내 인생의 끝자락에는 이런 끔찍한 고독과 허무함만 남겨진 것인가 하는 지독한 억울함이 제 온몸을 집어삼킵니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거대한 감정의 해일이 덮칠 때면 숨이 턱턱 막히고 제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처량한 존재로 느껴져서 바닥에 주저앉아 소리 내어 엉엉 울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밤을 지새우곤 합니다.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볼 때면 언제 이렇게 늙고 병들어버렸나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눈가에는 깊은 주름이 훈장처럼 패어 있고 머리숱은 듬성듬성 빠져 앙상한 데다가 어깨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잔뜩 굽어 있는 전형적인 힘없는 노인의 모습이 저를 비웃는 것 같습니다. 몸이라도 건강하면 어떻게든 새로운 것을 다시 시작해 볼 용기라도 낼 텐데 날이 궂으면 무릎이 쑤시고 소화도 예전처럼 되지 않아 약봉지에 의지하는 날들이 늘어갈수록 자신감은 바닥을 뚫고 끝없이 추락합니다.
백세 시대라고들 하는데 앞으로 남은 이삼십 년의 기나긴 세월을 도대체 무슨 낙으로 어떻게 버텨야 할지 눈앞이 캄캄합니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저 목숨이 붙어 있으니 하루하루 의미 없는 시간을 죽이며 죽음만을 기다리는 거대한 대합실에 갇혀버린 것 같은 공포감이 매일 밤 저를 괴롭힙니다.
코치님께 정말 벼랑 끝에 선 간절한 심정으로 묻고 싶습니다. 평생을 남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제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린 저 같은 사람도 이 늦은 나이에 다시 제 안의 빈 공간을 의미 있게 채울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존재할까요.
이미 굳어질 대로 굳어진 성격과 삶의 방식을 깨부수고 소박하더라도 온전히 나를 위한 즐거움이나 인생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려면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첫 단추를 다시 끼워야 하는지 정말 절실하게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매일같이 제 목을 조여오는 이 끔찍한 인생의 허무함과 과거에 대한 억울한 보상 심리를 부작용 없이 건강하게 털어내고 제 남은 노년의 삶을 평온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수련법이 있다면 부디 알려주십시오.
더 이상 껍데기만 남은 허수아비처럼 가족들의 눈치나 보며 쓸쓸하게 늙어가고 싶지 않고 남은 시간만이라도 제 이름 석 자를 걸고 진짜 제 인생의 주인공으로 당당하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길을 잃고 짙은 안갯속을 헤매는 늙은 길잡이에게 다시 한번 힘차게 걸어갈 수 있는 작은 불씨 같은 지혜를 꼭 나누어 주시기를 애타게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