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진짜 제 몸이 제 몸이 아닌 것 같아요. 가을을 타서 마음이 싱숭생숭한 건지, 아니면 갱년기 호르몬이 또 제멋대로 요동을 치는 건지.
아침에 남편 출근시키고 현관문 닫히는 소리 딱 듣고 나면, 그때부터 거실 소파랑 제 몸이 완전 찰떡처럼 한 몸이 돼버려요.
눈앞에 치우고 신경 써야 할 일은 진짜 에베레스트산처럼 첩첩산중 쌓여 있는데,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이 없어서 그냥 멍하니 거실 천장만 뚫어져라 보고 있네요.
당장 고개만 돌려도 할 일이 한가득이에요. 거실 한구석에는 안방 옷장에서 꺼내놓고 아직 박스에 넣지도 못한 가을겨울 옷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뒷베란다에는 분리수거해야 할 택배 박스랑 플라스틱이 사람 키만큼 산을 이루고 있어요.
주방은 또 어떻고요? 냉장고 문 한 번 열어보면 언제 사다 놨는지 기억조차 안 나는 검은 비닐봉지들이 구석에 콕 처박혀서 시들어가고 있고, 김치냉장고도 슬슬 김장철 다가오니까 한 번 싹 다 꺼내서 닦고 비워내야 하거든요.
머릿속으로는 벌써 고무장갑 끼고 청소기 돌리고 밑반찬 세 가지 뚝딱 만들었는데, 현실은 소파에 널브러져서 의미도 없는 핸드폰 영상만 슥슥 위로 올리고 있어요.
어디 신경 쓸 게 눈에 보이는 집안일뿐이면 차라리 낫게요? 이번 주말에는 시어른들 모시고 식사하기로 해서 괜찮은 식당도 미리 다 알아보고 예약해야 하고, 다음 달 남편 자동차 보험 갱신하는 것도 비교해봐야 해요.
애들은 다 커서 자기들끼리 독립해 나갔는데도 뭐 하나 물어볼 거 있으면 시도 때도 없이 톡을 보내서 엄마 이것 좀 찾아달라, 저 반찬 좀 해달라 귀찮게 굴고요. 진짜 생각해보면 아주 사소하고 자잘한 일들인데, 그게 거미줄처럼 막 여기저기 얽혀있으니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전혀 감이 안 잡히는 거예요. 실타래가 너무 심하게 엉켜버리면 풀 엄두도 안 나서 그냥 가위로 싹둑 잘라버리고 싶어지는 딱 그 심정이랄까요?
옛날 젊었을 때는 진짜 안 그랬거든요? 성격이 불같이 급해서 눈에 뭐 하나 거슬리는 꼴을 못 봤어요. 맞벌이하면서 퇴근하고 돌아와 밤 10시가 넘어도 청소기 밀고 바닥에 물걸레질까지 뽀득뽀득 해야 직성이 풀렸고요. 명절에는 전 부치면서 동시에 갈비찜에 나물 무치기까지 가스불 세 개 켜놓고 주방을 날아다녔는데 말이죠.
요새는 바닥에 머리카락이랑 먼지가 막 굴러다니는 걸 두 눈으로 빤히 보면서도 '어유, 내일 치우지 뭐' 하고 그냥 슬쩍 외면해 버려요. 한 번 엉덩이 붙이고 소파에 앉으면 다시 일어나는 게 무슨 큰 대수술하러 들어가는 것처럼 무섭고 한없이 피곤하네요.
이 와중에 제일 기운 빠지는 건, 저 혼자 이렇게 머릿속으로 수백 가지 일들 짊어지고 끙끙대며 속 끓이고 있는데 우리 식구들은 제 속을 너무 모른다는 거예요.
저녁에 남편 퇴근하고 들어오면, 현관에 며칠째 방치된 택배 박스나 재활용 쓰레기 한 번쯤 쓱 들고 나가서 버려주면 얼마나 예뻐요? 근데 그냥 발로 툭 밀치고 들어와서는 씻지도 않고 소파에 털썩 앉아 텔레비전 리모컨부터 찾아요. 그러고는 "오늘 저녁은 찌개야?" 하고 해맑게 묻는데, 진짜 그럴 때면 명치끝에서부터 뜨거운 천불이 확 올라와요. 빽 소리 지르고 한바탕 엎어버리고 싶은데, 싸우는 것도 에너지가 있어야 하잖아요. 요새는 화낼 기운조차 없어서 멍하니 남편 뒤통수만 째려보다가 "어, 대충 차려 먹어" 하고 입을 꾹 닫아버려요.
이게 우울증이 오려는 건지 지독한 무기력증인 건지, 아니면 평생 식구들 뒤치다꺼리 하느라 제 영혼까지 배터리가 싹 다 방전돼버려서 고장이 난 건지 모르겠어요.
진짜 솔직한 심정으로는 지금 당장 눈 딱 감고 다 팽개친 다음에 어디로 훌쩍 내빼버리고 싶어요. 짐 챙길 기운도 없으니까 그냥 주머니에 지갑 하나 달랑 찔러 넣고 아무도 나를 모르는 낯선 동네 허름한 민박집 같은 데 꽁꽁 숨어버리고 싶네요.
며칠 동안 아무도 나한테 밥 차려 달라는 소리 안 하고, 누구 엄마, 여보 부르는 소리 안 들리는 조용한 곳에서 핸드폰도 아예 꺼버리고 그냥 시체처럼 죽은 듯이 잠만 잤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나 없이 집구석이 쓰레기장이 되든 말든, 냉장고에서 음식이 썩어 문드러지든 말든 나 몰라라 하고 도망쳐버리고 싶은 이 나쁜 마음을 꾹꾹 누르느라 매일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요.
근데 또 헛웃음 나고 서글픈 게 뭔지 아세요? 그렇게 싹 다 도망치고 싶다고 하루에도 열두 번씩 혼자 상상하면서도, 막상 진짜 도망치라고 멍석 깔아주고 등 떠밀어주면 절대 못 그럴 거라는 걸 제가 제일 잘 안다는 거예요.
내가 안 치우면 결국 그 더러운 꼴 나중에 다 내 손으로 다시 치워야 하고, 내가 밥 안 차려놓고 나가면 식구들 대충 컵라면이나 배달 음식으로 때우며 건강 상할 텐데... 그 뒷감당이 무서워서, 아니 식구들 밥 굶을까 봐 걱정하는 그놈의 지긋지긋한 오지랖 때문에 결국 또 꾸역꾸역 무거운 몸을 일으키게 되겠죠. '엄마'라는 자리가, '주부'라는 이름표가 족쇄처럼 제 발목을 꽉 물고 놔주지를 않아서 숨이 막히네요.
오늘도 소파에서 몇 시간을 시체처럼 뒹굴다가, 이러다 진짜 집안 꼴이 돼지우리 되겠다 싶어서 무거운 엉덩이를 간신히 떼고 주방 싱크대 앞에 섰어요. 어젯밤 남편이 먹고 내놓은 말라비틀어진 밥풀 붙은 그릇들에 퐁퐁 묻혀서 빡빡 닦아내는데 왠지 모르게 눈물이 핑 돌더라고요. 내가 내 집 치우는 건데 뭐가 억울해서 우나 싶어 피식 헛웃음도 나고, 그냥 아무 의욕도 없이 기계처럼 껍데기만 덜그럭거리며 움직이는 제 처지가 너무 궁상맞아 보여서요.
누구 하나 나 평생 수고했다고, 집안일 하느라 고생한다고 따뜻하게 등 토닥여주는 사람도 없고, 끝도 없이 매일매일 반복되는 이 지독한 살림의 굴레에서 죽기 전까지는 영원히 못 빠져나올 것 같아 답답했어요. 월급도 없고 퇴직도 없는 주부라는 직업이 새삼 참 잔인하게 느껴지는 날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