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쉼 없이 돌아가는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제 한 몸 부서지는 줄도 모르고 일에만 매달려 살아왔습니다. 한 가정의 기둥이라는 무거운 책임감은 때로는 숨통을 조여오는 압박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제가 이 험한 세상을 꿋꿋하게 버텨낼 수 있게 해주는 가장 강력하고 유일한 삶의 원동력이었습니다.
매달 통장에 찍히는 월급의 숫자를 보며 아내의 노고를 위로하고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거뜬히 해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저는 제 인생이 꽤나 가치 있고 훌륭하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밖에서 아무리 모욕적인 말을 듣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저를 반겨주는 가족들의 환한 얼굴을 보면 그 모든 상처가 씻은 듯이 낫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직장이라는 튼튼한 울타리에서 떠밀리듯 빠져나와 덩그러니 맨몸으로 세상에 남겨지고 나니 제가 평생을 바쳐 쌓아온 그 굳건했던 정체성이 하루아침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것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매달 가족들에게 쥐여주던 돈줄이 끊기고 나니 제 스스로가 아무런 쓸모도 없는 텅 빈 껍데기로 전락해버린 것 같아 하루하루가 참담하고 서글프기만 합니다.
제가 현역에서 물러나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집안의 공기는 제가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뼈아프게 깨닫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각자의 가정을 꾸리고 밥벌이를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치열한 전쟁터 한가운데 서 있고 아내 역시 평생 저와 아이들을 뒷바라지하느라 미뤄두었던 자신만의 사회생활과 다양한 모임들로 하루하루를 활기차게 채워가고 있습니다. 다들 저마다의 분명한 목적지와 역할을 가지고 아침이면 힘차게 현관문을 나서는데 오직 저 혼자만 목적지를 잃어버린 채 이 적막한 집안에 섬처럼 둥둥 떠 있습니다.
가족들이 각자의 몫을 해내며 바쁘게 살아가는 모습은 부모로서 남편으로서 당연히 기뻐하고 든든하게 응원해야 할 일이지만 텅 빈 거실 소파에 홀로 우두커니 앉아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만 듣고 있노라면 저들의 저 눈부시고 바쁜 일상 속에 이제 제가 끼어들 틈이나 온전한 역할은 세상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는 뼈아픈 사실을 잔인하게 확인받는 기분입니다.
이런 씁쓸한 소외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제 속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나 어느새 거대한 자책감과 피해의식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주말에 모처럼 가족들이 집에 모여 텔레비전을 보며 웃고 떠들 때도 저는 그들 곁에 편안하게 앉아있지를 못하겠습니다.
제가 거실에 덩그러니 앉아있는 것 자체가 한창 즐겁게 돌아가는 젊은 가족들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묘한 눈치를 주게 만드는 것 같아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집니다. 아이들이 지나가는 말로 요즘 회사 일이 힘들다거나 대출 이자가 올라서 걱정이라는 식의 푸념을 툭 던지기라도 하면 예전 같았으면 아버지가 조금 보태주마 하며 든든한 방패막이가 되어주었을 텐데 이제는 그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푹 숙일 수밖에 없는 제 무능함이 가슴을 무참히 후벼 팝니다.
경제적인 능력을 상실했다는 사실은 단지 지갑이 얇아졌다는 것을 넘어서 가족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고 보호자가 되어주던 제 존재의 근간을 뿌리째 뒤흔들어버렸습니다. 제가 거실에서 숨을 쉬고 밥을 축내는 이 모든 평범한 일상의 순간들이 바쁘고 힘들게 살아가는 아내와 자식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하나 더 얹어주는 것 같아 물 한 모금을 넘기는 것조차 죄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 초라함을 감추고 가족들에게 거추장스러운 짐 덩어리가 되지 않기 위해 선택한 가장 비겁하고 슬픈 방법은 바로 스스로 방문을 굳게 닫아버리고 철저하게 숨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아침에 아내가 깰까 봐 숨죽여 일어나 거실로 나가지도 않고 방 안에서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며 길고 긴 시간을 죽입니다. 가족들이 밥을 먹을 때도 밥맛이 없다는 핑계를 대거나 이미 대충 먹었다고 뻔한 거짓말을 하며 다 같이 앉는 식탁에 합류하는 것을 고의로 피하게 되었습니다.
혹시라도 제가 거실에 나갔다가 가족들이 저를 신경 쓰느라 수고를 하거나 저의 눅눅하고 어두운 기운이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전염될까 봐 두려워 차라리 투명 인간처럼 제 존재를 집안에서 지워버리는 쪽을 택한 것입니다. 굳게 닫힌 문 너머로 들려오는 식구들의 평범한 대화 소리나 도마 위에서 칼이 부딪치는 경쾌한 소리를 듣고 있으면 당장이라도 방문을 활짝 열고 나가 그 따뜻한 온기 속에 섞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제가 다가가는 순간 그들의 평화가 보기 좋게 깨질 것만 같은 지독한 두려움이 제 발목을 천근만근 무겁게 붙잡습니다.
햇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어두운 방안에 홀로 웅크려 누워 있으면 제 안의 수많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고 제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놓습니다.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왜 내 인생의 마지막 장은 이렇게 초라하고 비참한 고립으로 끝이 나야 하는지 억울함에 눈시울이 붉어지다가도 결국 이 모든 비극은 다 무능하고 못난 제 탓이라는 가혹한 자학으로 끝이 납니다. 차라리 내가 이 세상에서 조용히 흔적 없이 사라져 주는 것이 평생 고생만 한 아내와 제 살길 찾기 바쁜 아이들을 진정으로 도와주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하는 극단적이고 무서운 생각마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돕니다.
내가 살아 숨 쉬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게 민폐가 되고 불필요한 짐 덩어리가 된다는 이 끔찍한 인식은 사람의 영혼을 완벽하게 파괴하고 삶의 마지막 남은 생존 의지마저 차갑게 짓밟아버리는 무서운 맹독과도 같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하게 숨을 쉬며 살아있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이미 끝없이 추락하며 부서져 내리고 있는 완벽한 마음의 죽음을 매일 밤 생생하고도 끔찍하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이렇게 지독한 우울의 병에 걸려 새카맣게 썩어가니 자연스럽게 몸의 건강도 하루가 다르게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온종일 방바닥에 누워 어두운 천장만 바라보고 있으니 소화가 제대로 될 리 만무하고 밤에는 지나온 삶에 대한 끝없는 후회와 자책감 때문에 창밖이 훤하게 밝아올 때까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지독한 불면의 고통에 시달립니다.
따뜻한 햇볕을 보지 못하고 활동량이 극단적으로 줄어드니 근육은 빠르게 말라가고 다리에는 힘이 풀려 화장실을 가는 아주 짧은 걸음조차 위태롭고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몸이 형편없이 쇠약해지는 것을 스스로 생생하게 느끼면서도 밖으로 나가 다시 운동을 하거나 밥을 제대로 챙겨 먹어야겠다는 생존의 의욕조차 도무지 생기지가 않습니다.
이대로 시름시름 앓다가 진짜 자리보전하고 누워 늙은 아내와 바쁜 자식들의 수발까지 받아야 하는 끔찍한 상황이 오면 그 지독한 죄책감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덜컥 겁이 납니다.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발버둥 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가족들에게 더 큰 짐을 지우기 전에 이 초라하고 볼품없는 생이 제발 빨리 끝나주기를 바라는 무기력한 절망 속에서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지옥 같은 자책과 철저한 고립의 굴레 속에서도 아주 가끔은 살고 싶고 다시 사랑받고 싶다는 인간 본연의 처절한 외침이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질 때가 있습니다. 주말에 손주들이 놀러 와서 할아버지 하며 해맑게 웃으며 안겨 올 때나 아내가 닫힌 방문 밖에서 당신이 좋아하는 된장찌개 끓였으니 얼른 나와서 밥 먹으라고 다정하게 부를 때면 제 굳어버린 심장 한구석이 찌릿하게 아파오며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습니다.
저도 그 환하고 따뜻한 빛이 있는 거실로 당당하게 걸어 나가 가족들과 함께 부드럽게 눈을 맞추고 실없는 농담도 나누며 아주 평범하고 포근한 늙은 남편이자 인자한 아버지로 다시 살아가고 싶습니다. 단지 돈을 벌어다 주는 기계나 경제적인 책임을 지는 자리가 아니라 그저 저라는 사람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우리 가족들에게 편안한 쉼터가 되어주고 조건 없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제 스스로가 다시 한번 굳게 믿어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너무 오랜 세월 동안 경제적 능력이라는 단단한 갑옷으로만 제 자신을 증명해 왔기에 그 무거운 갑옷을 모두 벗어버린 맨몸의 초라한 나를 대체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가족들 앞에 당당하게 세워야 할지 그 소중한 방법을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웅크린 채 벼랑 끝에 선 간절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인생의 나침반을 구하고자 합니다. 돈을 벌지 못하고 사회적인 굵직한 역할이 모두 끝났다고 해서 내 인생 전체가 무가치한 쓰레기가 되어버렸다는 이 지독한 착각과 깊은 우울의 늪에서 제 스스로를 건져 올리려면 도대체 어떤 마음가짐으로 눈을 뜨고 하루를 시작해야 할까요.
나 스스로를 가족들의 앞길을 막는 거추장스러운 짐 덩어리라고 가혹하게 깎아내리는 이 잔인한 생각의 사슬을 끊어내고 다시 용기를 내어 굳게 닫힌 방문을 활짝 열고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단단한 내면의 힘과 구체적인 마음 치유의 첫걸음이 있다면 부디 저를 살려주는 셈 치고 가르쳐 주십시오. 남은 제 소중한 노년의 시간들을 스스로 만든 외롭고 비참한 감옥 속에서 사랑하는 가족들에 대한 뼈아픈 죄책감으로만 갉아먹으며 끝내고 싶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