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세대에게 직장이란 그저 돈을 버는 수단 그 이상의 의미였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가족을 건사하고 하루하루 살아내기 위해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어느덧 제 나이도 60대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지각 한 번 없이 성실하게 출근 도장을 찍었고, 남들이 꺼리는 궂은일도 묵묵히 감내하며 참으로 치열하고 억척스럽게 살아왔습니다. 아프면 진통제를 삼켜가며 버텼고, 가족들의 따뜻한 저녁을 위해 제 청춘의 시간들을 기꺼이 일터의 쳇바퀴 속에 갈아 넣었습니다.
정작 정년 퇴사라는 거대한 변화가 눈앞에 다가오니, 홀가분함보다는 숨이 턱 막히는 두려움이 먼저 앞섰습니다. 아직 경제적으로 완벽한 은퇴를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저는 평생을 다녔던 직장의 문을 완전히 나서기도 전에 서둘러 다음 일자리를 찾아 나서야만 했습니다.
쉬지 않고 달려온 낡은 몸을 이끌고 또다시 한 치 앞도 모르는 새로운 생존 경쟁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압박감은, 제 마음속 깊은 곳에 시커먼 우울의 씨앗을 심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의 병이 겉잡을 수 없이 커진 것은 본격적으로 재취업을 준비하면서부터였습니다. 주변의 조언을 듣고 정부에서 지원하는 취업 지원 프로그램이나 교육 카드를 신청해보려 낡은 컴퓨터 앞에 앉았지만, 모니터 화면에 떠오르는 모든 것들이 제게는 거대한 장벽과도 같았습니다.
복잡한 고용 포털 사이트에 접속하는 것부터가 숨이 막히는 난관이었습니다. 수많은 공동인증서 절차와 처음 들어보는 복잡한 행정 용어들, 그리고 시력이 침침해진 눈으로는 돋보기를 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작은 글씨들을 마주할 때마다 저는 벼랑 끝으로 등 떠밀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비밀번호를 연속으로 틀려 계정이 잠겨버렸을 때의 그 참담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평생을 성실하게 일하며 제 몫을 다했다고 자부했는데, 차가운 모니터 앞에서는 서류 한 장 스스로 떼지 못해 쩔쩔매는 한없이 무능하고 초라한 뒷방 늙은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세상은 저 멀리 눈부시게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는데, 저 혼자만 캄캄한 암흑 속에 덩그러니 버려진 것 같은 깊은 소외감은 결국 심각한 신체적 이상 증세로 터져 나왔습니다.
가장 먼저 무너진 것은 일상이었습니다. 가슴 한가운데는 늘 커다란 바위를 얹어놓은 것처럼 숨을 쉬기가 답답했고, 시도 때도 없이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습니다.
밤이 되어 몸은 천근만근 무거운데 정작 불을 끄고 누우면 미래에 대한 공포와 불안감이 파도처럼 밀려와 새벽 내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습니다.
따뜻한 밥을 먹어도 입안에서는 모래알을 씹는 것처럼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고, 시도 때도 없이 명치가 꽉 막혀 밥 대신 소화제로 끼니를 때우는 날들이 늘어갔습니다.
제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던 순간은, 어느 늦은 오후 취업 지원 사이트에서 이력서를 제출하려다 오류 창이 뜨며 몇 시간 동안 쓴 글이 모두 날아가 버렸을 때였습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마우스를 쥐고 있던 저는 그만 책상에 엎드려 어린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어 통곡하고 말았습니다.
지난 수십 년의 땀방울이 모두 쓸모없는 것으로 부정당하는 것 같은 뼈저린 허무함,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이 한꺼번에 둑을 무너뜨리고 쏟아져 내린, 제 인생 가장 아프고 끔찍했던 번아웃의 절정이었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식음 전폐하고 폐인처럼 울며 지내다가, 문득 화장실 거울 속에 비친 퀭한 제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초점을 잃어버린 흐리멍덩한 눈동자와 핏기 없이 바싹 마른 입술을 보는 순간, 이대로 가다가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도 전에 제 자신이 먼저 철저하게 부서져 죽어버리겠다는 덜컥 겁이 났습니다. 살아야겠다는 본능이 꿈틀거렸습니다.
저는 그날로 책상 위에 켜져 있던 컴퓨터 전원 코드를 아예 뽑아버렸습니다. 재취업 서류나 자격증 안내 책자, 복잡한 비밀번호가 적힌 수첩도 모두 보이지 않는 거실 서랍 깊숙한 곳에 던져버렸습니다.
당장의 조급함을 완벽하게 내려놓고, 바닥까지 방전되어 텅 비어버린 제 마음의 배터리를 다시 채우는 일에만 모든 시간을 쏟기로 독하게 마음을 먹은 것입니다.
아무것도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고 온전히 제자리에 멈춰 서는 것, 그것이 역설적이게도 벼랑 끝에 선 저를 다시 살려낸 가장 위대한 첫걸음이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습관적으로 하던 걱정들을 강제로 멈추고, 그저 베란다 창가에 앉아 멍하니 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습니다. 취업과 관련된 복잡한 활자 대신, 아주 오래전에 사두었던 얇고 쉬운 수필집을 꺼내어 바닥에 편하게 누운 채로 읽어 내려갔습니다.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억지로 읽지 않고 책을 덮은 채 스르르 달콤한 낮잠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남들보다 뒤처지면 안 된다는 평생의 강박을 처음으로 제 손으로 끊어낸 것입니다.
오후가 되면 답답한 집을 벗어나 동네 근처의 작은 공원으로 무작정 걷기 위해 나갔습니다. 누구보다 빨리 걸어서 목적지에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버렸습니다. 발바닥에 닿는 폭신한 흙의 감각과 이마의 땀을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결에만 집중하며, 평소보다 세 배는 느린 걸음으로 느릿느릿 산책을 했습니다.
길가에 피어난 이름 모를 작은 들꽃을 쪼그려 앉아 한참 동안 들여다보기도 하고, 벤치에 가만히 앉아 깊은숨을 코로 끝까지 들이마시고 입으로 길게 내뱉으며 몸속의 답답한 찌꺼기들을 밖으로 비워내는 호흡을 반복했습니다. 저녁에는 시장에 들러 싱싱한 식재료를 조금 사 와서,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저 자신만을 위해 따뜻하고 정성스러운 찌개를 끓여 천천히 꼭꼭 씹어 먹었습니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성과를 내야 한다는 무서운 압박에서 벗어나 오직 나라는 사람의 숨결과 평안함에만 집중하는 날들이 한 달, 두 달 차곡차곡 쌓이자 신기하게도 몸과 마음이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있던 위장이 서서히 부드러워지며 다시 밥맛이 돌기 시작했고, 밤에는 뒤척이는 시간 없이 아침 해가 뜰 때까지 깊은 단잠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저를 가장 괴롭혔던 '나만 뒤처졌다'는 극심한 불안감이 눈 녹듯 사라지고, '지금까지 그 모진 세월을 잘 버텨온 나 자신이 참 대견하고 눈물겹게 고맙다'는 따뜻한 자기 긍정이 텅 빈 가슴을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고 진심으로 존경하는 여러분들. 평생을 누군가의 아내로, 헌신적인 엄마로, 그리고 치열한 일터의 성실한 일원으로 살아오다 이제 막 인생의 거대한 전환점을 마주하신 여러분들의 어깨가 지금 얼마나 무겁고 아플지 저는 너무나도 뼈저리게 공감합니다.
혹시 지금 과거의 저처럼 알 수 없는 무기력함에 빠져 매일 밤 남몰래 눈물짓고 계시거나, 당장 내일의 생계를 위해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는 컴퓨터 앞에 앉아 깊은 한숨을 쉬고 계시다면 제발 잠시만 그 자리에서 멈춰 서시기를 간곡히 두 손 모아 부탁드립니다.
지금 여러분들을 숨 막히게 덮친 그 지독한 번아웃은 결코 여러분들이 나약하거나 세상에 적응할 능력이 부족해서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수십 년을 뼈가 부서져라 일해 온 몸과 마음이 이제는 제발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를 좀 돌봐달라고 밖으로 터트리는, 너무나도 절박하고 정직한 구조 요청입니다.
우리는 이미 젊은 날을 다 바쳐 충분히 치열하게 살아왔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훌륭하고 위대한 인생을 일구어냈습니다. 퇴사 직후의 잠깐의 공백기나, 새로운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아 겪는 서툼 때문에 여러분들 자신이 가진 그 눈부시고 귀한 가치를 스스로 깎아내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서류 한 장의 통과 여부로 평가받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하고 아름다운 역사를 써 내려온 분들입니다.
오늘 하루만큼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복잡한 인터넷 창은 과감하게 닫아두시고, 바닥에 등을 대고 편안하게 대자로 누워 스스로의 굽은 등을 상상으로나마 아주 따뜻하게 토닥여 주십시오. 따뜻한 차 한 잔을 끓여 마시며 젊은 시절 좋아했던 옛 음악을 들어보거나, 저처럼 목적지 없이 발길 닿는 대로 느리게 걷는 산책을 통해 굳어버린 마음의 빗장을 조금씩 열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나를 온전히 품어주고 조건 없이 쉴 수 있게 허락하는 너그러운 쉼표의 시간들이 모이면, 바닥을 드러냈던 생의 에너지는 반드시 다시 따뜻하게 차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고 배우는 일은 내 마음의 뿌리가 단단하고 튼튼하게 회복된 이후에 천천히 준비해도 결코 늦지 않습니다.
오늘 하루도 각자의 삶의 무게를 견디며 치열하고 아름답게 버텨내신 여러분들의 지나온 모든 땀방울과 시간들을 온 마음을 다해 존경합니다. 앞으로 펼쳐질 여러분들의 제2의 인생이 쫓기듯 불안하고 외롭지 않기를, 스스로를 가장 다정하게 보듬어주는 평안한 휴식 속에서 늦게 피어 더 아름다운 꽃처럼 천천히 만개하기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또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