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에는 제 주변에 항상 사람들이 넘쳐나는 줄 알았습니다. 학교 동창부터 시작해서 군대 동기 그리고 사회에 나와서 만난 직장 동료들까지 주말이면 누구를 만나야 할지 고민할 정도로 곁에는 늘 북적거리는 인연들이 가득했습니다.
소주 한 잔 기울이며 밤이 새는 줄 모르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서로의 미래를 나누던 그 시절에는 이 친구들과 평생을 함께할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어느새 제 머리에는 희끗희끗한 서리가 내렸고 뒤를 돌아보니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휑한 바람만 부는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쩌면 내 곁에 머물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각자의 삶 속으로 흩어지는 과정을 묵묵히 지켜봐야만 하는 쓸쓸한 여정이라는 생각이 들어 요즘 부쩍 마음이 시려옵니다.
가끔은 텅 빈 거실에 혼자 앉아 스마트폰의 연락처 목록을 가나다순으로 천천히 넘겨보곤 합니다.
수백 명의 이름이 빼곡하게 저장되어 있지만 막상 지금 당장 소주 한 잔 하자며 편하게 전화를 걸 수 있는 번호는 단 하나도 없더라고요. 예전 같았으면 시간이나 장소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달려와 주었을 친구들인데 이제는 전화를 걸기 전부터 머릿속이 복잡해집니다.
이 친구는 지금 손주를 돌보느라 바쁘지 않을까 저 친구는 아직 현역에서 일하느라 피곤하지 않을까 하며 온갖 핑계를 지레짐작하다 보면 결국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화면만 끄게 됩니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조차 큰 용기가 필요해진 지금의 상황이 서글프기도 하고 끈 떨어진 연처럼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깊은 고립감에 빠지곤 합니다.
어쩌다 경조사나 연말연시 동창회 같은 모임에 나가게 되어도 예전처럼 마음이 편안하고 즐겁지가 않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지만 막상 자리에 앉아 술잔을 부딪치다 보면 대화의 주제는 늘 정해져 있습니다.
누구네 자식이 대기업에 취업했다더라 누구는 어디에 사둔 부동산이 얼마나 올랐다더라 하는 식의 자랑이나 현실적인 조건들을 비교하는 이야기뿐입니다.
그런 대화들 틈에 끼어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고 맞장구를 치다 보면 제 속은 점점 더 텅 비어가는 느낌을 받습니다. 정작 제가 요즘 느끼는 인생의 허무함이나 무기력함 같은 진짜 속마음은 꺼낼 엄두조차 내지 못합니다.
다들 겉으로는 화려하고 문제없이 잘 사는 것처럼 치장하기 바쁜데 그 틈에서 제 우울하고 어두운 감정을 털어놓는 것은 분위기를 망치는 눈치 없는 짓이 되어버릴 것 같아 입을 굳게 닫게 됩니다.
가장 쓰라린 기억은 얼마 전 학창 시절부터 꽤 가깝게 지냈다고 생각했던 친구에게 용기를 내어 제 답답한 심정을 털어놓았을 때의 일입니다.
퇴직 이후에 찾아온 정체성의 혼란과 깊은 무기력증 때문에 하루하루가 모래성을 씹는 것 같다고 힘겹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내심 따뜻한 위로 한마디를 기대했건만 돌아온 대답은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는 차가운 핀잔이었습니다.
다들 늙어가면서 몸 아프고 돈 걱정하며 사는데 넌 연금도 나오고 밥 굶을 걱정도 없으면서 무슨 우울증 타령이냐며 오히려 저를 나약한 사람 취급하더라고요.
그 순간 제 가슴속에서 무언가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내가 내보인 상처가 상대방에게는 그저 하찮은 투정으로 치부되는 것을 겪고 나니 더 이상은 누구에게도 제 진짜 속마음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깊은 체념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런 쓸쓸함을 견디다 못해 혼자서 나름대로 인간관계를 다시 넓혀보려고 참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예전에 연락이 끊겼던 친구들에게 먼저 안부 카카오톡도 보내보고 밥 한번 먹자고 약속도 잡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수십 년의 세월 동안 각자 살아온 환경이 너무 달라져 버린 탓인지 억지로 만난 자리에서는 숨 막히는 어색함만 감돌았습니다. 공통의 관심사가 없으니 대화는 자꾸만 겉돌았고 옛날 추억을 곱씹는 것도 한두 번이지 결국 시계를 보며 언제 자리를 파해야 할지 눈치만 보게 되더라고요.
안 되겠다 싶어서 동네 주민 센터에서 운영하는 등산 동호회나 탁구 교실 같은 곳에도 등록을 해보았습니다.
땀을 흘리며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면 마음이 좀 열릴까 싶었거든요. 하지만 그곳에서 맺어지는 관계들 역시 얄팍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운동할 때만 반갑게 인사할 뿐 그 이상의 깊은 유대감으로 발전하기에는 서로가 치고 있는 마음의 벽이 너무나도 높고 단단했습니다.
혹시 내 성격이 너무 꼬여서 사람들이 다가오지 않는 것일까 자책하며 저 스스로를 바꿔보려는 노력도 숱하게 해보았습니다.
대인관계에 관한 책들을 찾아 읽으며 남의 말을 경청하는 법이나 공감하는 대화의 기술 같은 것들을 익혀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모임에 나가면 억지로라도 입꼬리를 올려 웃는 상을 만들고 다른 사람들의 지루한 자랑이나 넋두리도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들어주었습니다.
상대방이 기분 좋아할 만한 칭찬도 아끼지 않으며 어떻게든 둥글둥글하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남의 비위를 맞추고 돌아오는 길에는 감당할 수 없는 피로감과 허탈감이 폭풍처럼 밀려왔습니다.
진짜 내 모습은 꼭꼭 숨긴 채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억지로 쓴 웃는 가면이 무거워질수록 군중 속에서 느끼는 철저한 고독감은 오히려 제 목을 더 세게 조여왔습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젊었을 때 맺었던 관계들은 이해관계 없이 순수하게 감정을 교류할 수 있었지만 나이가 들어서 맺는 관계는 철저하게 상황과 필요에 의해 유지되는 것 같습니다.
조금이라도 상대방에게 짐이 되거나 우울한 기운을 전염시킬 것 같으면 가차 없이 밀려나고 잊히는 것이 냉혹한 어른들의 세계라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습니다. 평생을 가족들을 먹여 살리고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정작 내 마음을 나눌 진짜 친구 하나 만들어두지 못했다는 사실이 제 인생 전체를 실패한 것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나이가 들면 지혜로워지고 마음도 넓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속은 더 좁아지고 남의 말 한마디에 쉽게 상처받는 옹졸한 늙은이가 되어버린 것 같아 거울을 볼 때마다 제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집니다.
돈이나 명예보다도 해 질 녘에 슬리퍼 끌고 나가 말없이 소주잔을 부딪치며 내 한숨 소리조차 이해해 줄 수 있는 단 한 사람의 진짜 친구가 세상에서 가장 부럽고 간절해집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세상과 단절된 채 늙어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가끔 텔레비전을 보면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이 동네 어귀 평상에 모여 앉아 시시콜콜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박장대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평범한 풍경이 제게는 닿을 수 없는 신기루처럼 멀게만 느껴집니다. 그분들은 어떻게 저 나이까지 저토록 편안하고 격의 없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인지 그 비결이 너무나 궁금합니다.
저도 그런 허물없는 친구를 만들고 싶어 수없이 마음을 다잡고 먼저 다가가 보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의 쓴맛만 보고 상처만 안은 채 뒷걸음질 치게 되더라고요.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결국 사람으로 치유해야 한다는 말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두려움이 앞서서 자꾸만 깊은 동굴 속으로 제 자신을 밀어 넣게 됩니다.
겉으로는 덤덤한 척 고독을 즐기는 척 위장하고 있지만 사실 매일 밤 뼈에 사무치는 외로움과 싸우며 누군가 먼저 제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두드려주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제 모습이 참으로 애처롭습니다.
코치님께 가장 묻고 싶고 또 간절하게 해답을 찾고 싶은 부분은 바로 이 끝없는 고독감을 스스로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인간관계의 폭이 좁아지고 친구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 정말 피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인생의 흐름인지 묻고 싶습니다.
만약 이것이 누구나 겪는 필연적인 과정이라면 시도 때도 없이 제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외로움과 공허함을 도대체 어떤 마음가짐으로 안고 살아가야 숨통이 트일 수 있을까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강한 척 버티고 있지만 속으로는 사람의 온기가 미치도록 그리운 이 모순된 감정의 늪에서 저 스스로를 구출해 낼 수 있는 현실적인 처방전이 너무나도 절실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은 이미 이렇게 머리가 굵어지고 각자의 삶의 방식이 굳어져 버린 중년 혹은 노년의 시기에도 진정으로 속마음을 나눌 수 있는 깊은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존재하느냐는 것입니다.
동호회나 모임에서 겉핥기식으로 인맥을 늘리는 것 말고 정말 내 밑바닥의 찌질한 감정까지 가감 없이 보여주어도 온전히 수용받을 수 있는 그런 진짜 친구를 찾기 위해서는 제가 먼저 어떤 태도를 취하고 어떤 용기를 내야 할지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마음의 거리를 좁혀나가는 지혜로운 소통의 방법이나 제가 사람을 대할 때 놓치고 있는 대인관계의 핵심이 있다면 정신이 번쩍 들도록 따끔하게 짚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남은 제 인생의 시간들을 이렇게 끝없는 외로움과 후회 속에서만 갉아먹으며 허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비록 젊은 시절처럼 화려하고 떠들썩하지는 않더라도 아주 소박하고 진실된 마음의 교류를 나누며 누군가에게는 저 역시 편안한 안식처 같은 기댈 곳이 되어주고 싶습니다.
더 늦기 전에 스스로 높게 쌓아 올린 마음의 감옥에서 무사히 걸어 나와 다시 한번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살아갈 수 있도록 코치님의 진심 어린 조언과 명쾌한 나침반을 애타게 기다리겠습니다. 부디 이 길 잃은 발걸음에 작은 빛을 비춰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