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질적으로 우울함을 타고 난 아이였다.
타고나길 그릇이 작았고 예민했고 스트레스에 취약했다. 그래서 쉽게 지쳤다.
세상에 모든 것이 나에게는 스트레스였고
태어났으니 살긴 살아야겠는데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죽어야 할 이유도 찾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은 우울증이라고 하면 하루 종일 울거나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떠올리지만
나에게 우울증은 슬픔보다는 무감각, 무기력함에 가까웠던 것 같다.
모든 감정의 색이 조금씩 바래버린 것처럼.
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숙제였다.
아침에 눈을 뜨면 출근을 하고, 일을 하고, 퇴근하고, 오지 않는 잠을 청하고, 다시 아침을 맞이하는 일을 반복했다.
살아 있다는 느낌보다는 그저 체크 리스트를 하나씩 지워 나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이것이 나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몇 년 전에 이 공간에 우울한 나의 마음을 담은 글을 썼을 때
단 한 분이 남겨주신 댓글의 한 문장이 마음에 깊게 남았다.
"어쩌면 누구보다 더 근원적인 질문들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시는 것 같습니다.
목적 없는 삶에 내던져 졌다는 불안과 무력감이 현실이라는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할 때가 있지요.
살아있는 한 인간은 불안과 부조리에서 벗어날 수 없고 완전한 안식을 할 수도 없으니 그저 살아가는 것이 맞지만
허무주의와 수동적 태도를 넘어서 삶의 가치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이 댓글을 보고 특별히 슬프다거나 마음이 동요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꽤 오래 울었던 것 같다.
그리고 생각했다.
삶의 가치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처음에는 삶의 가치라는 단어 자체가 무겁게 느껴지기만 했다.
뭔가, 대단한 것을 해야 할 것 같고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만 같고
나에게는 없던 열정이라는 것을 가져야 할 것만 같았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가치가 없는 존재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밖에 없었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평소 같았으면 다시 그렇게, 하루하루를 체크 리스트 목록을 지워가듯이 살아가는 삶으로 돌아왔겠지만
이상하게도 그 때 만큼은 자꾸 그 댓글이 머리에 맴돌았다.
그리고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나는 처음부터 너무 어려운 질문을 붙잡고 있었다는 것을.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애초부터 쉽게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그래서 질문을 바꿔 보기로 했다.
'오늘을 어떻게 버틸까.'
삶을 살아가는 대단한 이유를 찾기 보다는 그냥 오늘 하루를 무사히 끝내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리고 잠들기 전 다음 날 해야 할 목표를 하나씩 생각하고 잠들기로 했다.
어떤 날은 -아침에 일어나면 침대 정리하기-
또 어떤 날은 -아침 밥 꼭 챙겨 먹기-
또 어떤 날은 -퇴근하면 10분간 실내 자전거 타기-
또 어떤 날은 -쌓아둔 택배 박스 정리하기-
처음에는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그 다음은 -장 보기, 도서관 가보기, 재래시장 구경가기-와 같이 집 밖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어쩌면 남들이 보기에는 너무도 사소한 일이었지만
나에게는 살아 있다는 감각을 조금씩 되찾게 해 준 순간들이었다.
삶의 의미는 끝없이 고민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살아가며 조금씩 만들어나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제 들었던 그 노래가 좋아서 오늘 또 찾아서 듣게 되고
문득 보고 싶은 사람이 생겨서 연락 한번 해보게 되고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위로를 받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순간이 나에게도 오긴 오더라.
아직은 아주 사소하지만 이런 순간들이 조금씩 쌓여가면서
그래도 조금 더 살아봐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전히 아무 것도 하지 못할 만큼 마음이 가라앉고 허무해지는 순간이 문득 찾아오기도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나의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조금씩 해보게 된다.
그 때 그 댓글을 남겨주신 분은 알고 계실까.
그 한 문장이 한 사람의 마음 속에 오랫동안 남아, 삶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만일 예전의 나처럼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꼭 누군가에게 마음을 털어놓기 바란다.
전문가를 찾아가도 좋고, 이 공간에 털어놓는 것도 좋겠다.
어쩌면 나처럼, 살아갈 이유를 생각하게 만드는 한 문장을 만나게 될 수도 있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