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평생 가족 앞에서는 약한 소리 한번 내뱉지 않고 살아온 60대 중반의 평범한 가장입니다. 대한민국에서 남자로 또 아버지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고단한 훈장 같은 것이지요.
힘들어도 힘들다는 내색조차 사치라 여기며 묵묵히 제 자리에서 책임을 다해왔습니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나이가 60 줄을 훌쩍 넘어가니 마음은 아직 청춘인데 몸이 예전 같지 않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더군요.
어느 순간부터 자고 일어나도 개운하지가 않고 어깨부터 등허리까지 짓누르는 듯한 뻐근함이 훈장처럼 따라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한 탓이려니, 혹은 평생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온 육체가 이제야 비명을 지르는 것이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증상은 걷잡을 수 없이 심해졌습니다. 밤이 되면 찾아오는 불면증은 그야말로 지옥 같았습니다. 거실 시계가 새벽 2시, 3시를 가리키도록 눈은 말똥말똥하고 가슴 한가운데에는 큼지막한 돌덩이를 얹어놓은 것처럼 답답해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날이 허다해졌습니다.
소화도 안 되고 늘 속이 더부룩하니 밥맛도 떨어졌죠. 견디다 못해 동네 내과와 한의원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습니다. 피검사도 해보고, 침도 맞고, 좋다는 영양제도 챙겨 먹어봤지만 의사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특별한 이상은 없다, 스트레스성인 것 같으니 마음을 편히 먹어라"라는 원론적인 이야기만 되풀이할 뿐이었습니다. 내 몸은 이렇게 찢어지게 아프고 고통스러운데 병명조차 제대로 알 수 없으니, 그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안에 쌓인 고통과 억울함은 엉뚱하게도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 '분노'라는 형태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몸이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것에 대한 서러움을, 평생 나만 희생했다는 보상 심리를 아내에게 짜증으로 쏟아부었습니다.
국이 짜다며 숟가락을 탁 내려놓기 일쑤였고 늦게 귀가하는 자식들에게는 괜한 트집을 잡아 언성을 높였습니다. 제 속마음은 그게 아닌데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언제나 가시 돋친 칼날이 되어 가족들에게 상처를 입혔습니다.
화를 내고 돌아서면 내가 또 왜 그랬을까 자책하며 괴로워했지만 굳어버린 제 성격은 가족들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건네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집안에서 점점 외딴섬처럼 고립되어 갔고 가족들의 눈빛에는 저를 향한 걱정보다 피로감과 두려움이 짙어지는 것을 보며 벼랑 끝에 선 기분이었습니다.
그 무렵, 제가 쓰던 낡은 휴대폰이 액정도 깨지고 자꾸 전원이 꺼지자, 얼마 전 아들 녀석이 쓸만한 새 스마트폰으로 하나 싹 바꿔주고 갔습니다. 화면도 큼직하고 빠릿빠릿한 최신형 폰을 사 들고 와서는, 예전 폰에 있던 연락처며 사진들까지 통째로 다 옮겨주더군요.
그날 밤, 아들이 만져주고 간 새 폰이 신기해서 잠도 안 오는 김에 이것저것 기능들을 눌러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화면에 뜬 '마음 건강 이벤트'라는 글귀와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남사스럽다며 지나쳤겠지만, 그날따라 '자가점검'이라는 단어가 제 발목을 강하게 붙잡았습니다.
혹시 이 지독한 불면증과 가슴 통증이 진짜 마음의 병에서 온 건 아닐까? 볏짚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화면을 터치해 검사를 시작했습니다.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지, 피로감을 쉽게 느끼는지, 사소한 일에도 화가 나고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지, 내 자신이 쓸모없게 느껴지는지... 하나같이 제가 매일 밤 뜬눈으로 지새우며 괴로워했던 그 증상들이었습니다.
우울증이라고 하면 그저 방구석에 앉아 우울해하는 병인 줄로만 알았는데 제가 겪고 있던 이 모든 신체적 고통과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모두 마음이 보내는 구조 신호였다는 사실을 검사를 진행하며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문항에 체크를 마치고 결과가 나오기까지의 짧은 몇초가 저에게는 몇시간처럼 길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화면에 떠오른 제 점수를 보고 저는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제 점수는 무려 30점이었습니다. 붉은색 글씨로 선명하게 찍힌 '심한 우울 상태'라는 글자 아래로, 일상 유지가 어려울 만큼 우울감이 깊어져 적극적인 돌봄이 필요하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일상 유지가 어려우니 적극적인 돌봄이 필요하다는 문구를 읽고 나니 처음엔 덜컥 자존심부터 상했습니다. 평생 험한 세상 거뜬히 버티며 가족들 건사했는데 고작 이깟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해 이 모양이 됐나 싶어 허탈했지요.
하지만 매일 밤 온몸이 쑤시고 잠 못 이루던 그 지독한 고통들이 그리고 아내에게 앞뒤 없이 쏟아내던 그 못난 짜증들이 실은 내 마음이 곪아 터져서 지르던 비명이었다고 생각하니 뒤통수가 얼얼했습니다.
다음 날 저녁, 밥상머리에서 헛기침을 몇 번 하다가 아내 쪽으로 스마트폰을 쓱 밀어 보여주었습니다. "내가 요새 별것도 아닌 일에 당신한테 화내고 윽박지른 거... 다 이거 때문인가봐. 나도 내 맘대로 안 되네." 평생 살가운 미안하다는 소리 한 번 안 해본 놈이 불쑥 내민 결과지에 아내는 밥숟가락을 내려놓고 적잖이 놀란 눈치였습니다.
한참 화면을 들여다보더니 쯧쯧 혀를 차며 "알면 됐네. 내일 당장 동네 의원이라도 가봅시다" 하더군요. 원망 대신 돌아온 그 무뚝뚝한 대답 한마디에 꽉 막혀있던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당장 정신과에 가서 약을 타 먹거나 한 건 아닙니다. 대신 제 일상에 작은 규칙을 세웠습니다. 예전 같으면 욱해서 소리부터 질렀을 상황에 무조건 입을 꾹 닫고 베란다로 나가 심호흡을 열 번 하는 겁니다.
그리고 며칠 전부터는 핑계 대고 안 가던 뒷산 약수터에 매일 아침 오르고 있습니다. 땀을 쫙 빼고 찬물 한 바가지 마시고 내려오면 밤에 뒤척이는 것도 덜하고 밥맛도 조금 돕니다.
주말이면 웬일로 일찍 깼냐며 핀잔을 주는 아내를 따라 마트 장보기도 짐꾼 자처해서 따라나서고 있습니다. 거창한 치료는 아니지만 내가 아프다는 걸 인정하고 굽히니 집안에 맴돌던 날 선 공기가 많이 누그러졌습니다.
이 글을 보시는 60대 남자분들. 몸 쑤시고 잠 안 온다고 애먼 내과나 한의원 전전하며 진통제만 타 먹지 마십시오. 나이 먹고 무슨 우울증이냐고 내가 정신력이 약해서 그렇다고 고집부리다가 가족들 다 떠나고 후회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스마트폰으로 몇 분이면 하는 검사, 자존심 한 번 굽히고 해보십시오. 결과가 엉망으로 나오면 아내든 자식이든 보여주고 "나 요새 힘들다, 좀 도와달라" 하십시오.
평생 가족 위해 뼈 빠지게 살았는데 그깟 소리 한 번 못 하겠습니까. 약한 모습을 인정하는 게 사내대장부의 진짜 용기입니다. 혼자 끙끙 앓지 마시고, 당장 이 검사부터 해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