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쳇바퀴 돌듯 바쁘게 살아오다 드디어 은퇴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저는 내심 기대했던 풍경이 있었습니다.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나 아내와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시고 낮에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을 보며 소소한 일상을 나누는 평온한 노후를 꿈꿨습니다.
그동안 가족들 먹여 살리느라 제 몸과 마음이 너무 많이 지쳐 있었기에 이제는 낯선 바깥세상보다는 가장 익숙하고 편안한 집에서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그저 푹 쉬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제가 은퇴를 하고 집에 머물게 되니 아내의 일상은 제가 상상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아내는 아침 일찍부터 예쁘게 화장을 하고 동네 친구들과 등산을 가거나 문화센터에 그림을 배우러 간다며 바쁘게 집을 나섭니다.
평생 저와 아이들 뒷바라지하느라 고생한 아내이기에 이제라도 자기만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덩그러니 남겨진 텅 빈 거실에 홀로 앉아 있으면 형언할 수 없는 깊은 소외감과 서운함이 밀려오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현역에서 일할 때는 몰랐는데 아내는 이미 자기만의 확고하고 활기찬 세계를 완벽하게 구축해 놓고 있었습니다. 일주일에 며칠은 취미 생활을 하러 가고 또 며칠은 봉사활동이나 지인들 모임에 나가느라 집에 붙어 있는 시간이 거의 없습니다.
반면에 평생 직장 동료들과 일 얘기만 하며 살아온 저는 막상 일터에서 떨어져 나오니 사적으로 만날 사람도 없고 특별히 즐길 줄 아는 취미도 없는 철저한 외톨이더라고요. 아내가 나갈 채비를 할 때마다 어디 가느냐 언제 들어오느냐 묻게 되고 혼자 점심을 차려 먹기 싫어서 대충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다 보면 내 신세가 어쩌다 이렇게 초라해졌나 싶어 헛헛한 마음이 듭니다.
저녁 늦게 밖에서 에너지를 듬뿍 받고 돌아온 아내는 오늘 누구를 만나서 얼마나 재밌었는지 신나게 이야기를 하지만 저는 온종일 캄캄한 집안에서 시간만 보낸 탓인지 그 밝은 에너지에 맞장구를 쳐줄 여유가 생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만 이 적막한 집에 버려두고 자기 혼자만 신나게 놀다 왔다는 생각에 삐딱한 마음이 들어서 퉁명스러운 잔소리나 가시 돋친 말을 툭 던지게 되고 결국 사소한 감정싸움으로 번지는 일이 하루가 멀다 하고 반복되고 있습니다.
저도 이런 옹졸한 제 모습이 싫어서 상황을 바꿔보려고 나름대로 여러 가지 노력을 해보았습니다. 하루는 아내가 활동하는 등산 모임에 큰맘 먹고 억지로 따라나선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내의 지인들 틈에 껴서 알지도 못하는 남의 집안 이야기나 드라마 이야기에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짓는 것이 육체적인 노동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더라고요. 평생 남들 눈치 보며 살아왔는데 늙어서까지 불편한 자리에 껴서 억지웃음을 지어야 하나 싶어 그 뒤로는 아내가 같이 가자고 권유를 해도 두 번 다시 따라나서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집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유익하게 보내보려고 책도 사서 읽어보고 스마트폰으로 이것저것 영상도 찾아보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뚜렷한 목적 없이 시간만 죽이는 일상은 금세 지루해지고 무기력함만 키울 뿐이었습니다. 밖으로 나가 활동적인 에너지를 발산해야 직성이 풀리는 아내와 그저 조용하고 익숙한 공간에서 육체적 정신적 피로를 내려놓고 싶은 저의 근본적인 성향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생각보다 너무 거대한 벽처럼 느껴집니다.
아내에게 섭섭한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아 본 적도 있습니다. 내가 집에 있는데 하루쯤은 약속을 취소하고 나랑 같이 있어 주면 안 되냐고 투정 섞인 부탁을 해보았지만 아내는 오히려 제게 숨이 막힌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당신이 평생 밖으로 돌며 일할 때 자기는 이 답답한 집구석에서 혼자 외로움을 견디며 당신을 뒷바라지했는데 이제 와서 당신 심심하다고 내 소중한 일상까지 포기하라고 강요하는 건 너무 이기적인 것 아니냐며 날을 세우더라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것처럼 멍해졌습니다.
아내의 말이 구구절절 다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도 없었고 저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아내의 자유를 뺏으려 했던 제 자신이 너무나도 이기적이고 옹졸한 늙은이처럼 느껴져 지독한 자괴감마저 들었습니다. 은퇴를 하면 부부가 하루 종일 얼굴을 맞대고 정겹게 살 줄 알았는데 현실은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고 거리를 두는 과정의 연속이라 부부 관계의 딜레마에 깊이 빠져버린 기분입니다.
누군가는 저에게 남편이 돈 벌어다 주고 이제 시간도 많으니 당신도 알아서 밖으로 나가 친구도 만나고 멋진 취미도 만들어보라고 쉽게 조언하지만 평생을 억압된 환경에서 책임감 하나로 살아온 사람에게 하루아침에 새로운 즐거움을 찾으라는 것은 몹시 버겁고 두려운 일입니다. 제 안에는 여전히 사람들과 섞이는 것에 대한 피로감이 가득하고 낯선 환경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그저 안전한 집안에서 아내와 소박하게 텔레비전 채널이나 돌리며 쉬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크거든요.
그렇다고 매일같이 외출을 준비하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끙끙 앓고만 있다가는 언젠가 제 마음속에 억눌린 섭섭함이 엉뚱한 분노로 폭발해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될까 봐 두려운 마음도 듭니다. 따로 또 같이라는 말이 부부 사이에 가장 이상적인 형태라는데 저희 부부에게는 그 적당한 거리감과 균형을 찾는 것이 너무 어렵게만 느껴집니다.
이런 답답한 상황에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저희 부부가 서로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면서도 멀어지지 않을 수 있을지 묻고 싶습니다. 밖으로 도는 아내를 제 옆에 억지로 주저앉히지 않으면서도 제가 느끼는 이 지독한 소외감을 건강하게 해소하고 부부로서의 유대감을 유지할 수 있는 현명한 조언과 현실적인 타협점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아내의 활기찬 일상을 진심으로 응원해 주면서도 텅 빈 집에서 저 스스로를 갉아먹지 않고 단단하게 바로 설 수 있으려면 꼬여버린 마음가짐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오랜 세월 함께 버텨온 저희 부부가 은퇴라는 새로운 인생의 챕터 앞에서 서로에게 짐이나 상처가 되지 않고 각자의 모습 그대로 평온하게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도록 흔들리는 제 마음에 명쾌한 삶의 지혜를 나누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코치님 덕분에 고민이 해결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