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20대 후반에서 30대를 보내던 그 시절에는 안전 장비나 현장의 규정 같은 것들이 지금처럼 철저하게 지켜지지 않던 거칠고 투박한 시대였습니다.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하나 없는 맨주먹이었지만 어떻게든 아내와 갓 태어난 자식들 입에 따뜻한 밥을 먹이겠다는 일념 하나로 전국 방방곡곡의 험한 건설 현장과 산업 단지를 전전하며 청춘의 피땀을 쏟아부었습니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살갗이 검게 타고 한겨울 칼바람에 손발이 꽁꽁 얼어붙어도 두둑해진 월급봉투를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면 세상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막중한 가장의 무게 하나로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아찔하고 위험한 공사판을 겁 없이 누비며 버텨왔습니다. 하지만 그 무모했던 젊은 날의 현장에서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해야만 했던 그 끔찍한 사고는 수십 년의 세월이 무색하게도 여전히 제 삶을 옥죄는 지독한 족쇄가 되어버렸습니다.
벌써 30년도 훌쩍 넘은 옛날 일인데도 그날의 공기와 온도 그리고 코끝을 찌르던 매캐한 흙먼지 냄새까지 마치 어제 일처럼 뼛속 깊이 생생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늦여름의 장마가 막 끝나고 습기가 가득했던 찌는 듯한 오후였습니다. 저와 친형제처럼 가깝게 지내던 3살 터울의 싹싹한 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그 친구도 갓 100일이 지난 딸내미 분유 값을 벌겠다며 며칠 밤을 새워가며 잔업을 자청하던 참으로 성실한 녀석이었습니다.
현장 반장님의 호각 소리에 맞춰 커다란 타워크레인이 수 톤에 달하는 철근 더미를 아슬아슬하게 허공으로 끌어올리던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무언가 철제 케이블이 끊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마찰음이 고막을 찢을 듯이 울려 퍼졌고 불과 제 몇 걸음 앞을 걸어가던 그 동생의 머리 위로 거대한 쇳덩이들이 굉음과 함께 쏟아져 내렸습니다. 저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렸고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참혹하게 부서져 내린 현장의 잔해만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급차의 미친 듯한 사이렌 소리와 현장 사람들의 다급한 고함 소리가 뒤엉켜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제 귀에는 세상의 모든 소리가 차단된 것처럼 지독한 이명만 들려왔습니다. 무너진 철근 더미 사이로 붉게 번져가던 핏자국과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게 망가져 버린 동생의 마지막 모습은 제 뇌리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깊게 찍혀버렸습니다.
만약 내가 그 친구에게 캔커피라도 하나 건네며 걸음을 조금만 늦추게 했더라면 어쩌면 내가 앞장서서 걸어갔더라면 그 쇳덩이에 깔린 것은 내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저를 미치게 만들었습니다. 나만 운이 좋아서 멀쩡하게 살아남았다는 지독한 죄책감과 죽음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가 평생토록 제 영혼을 갉아먹으며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잠들지 못하게 만들더라고요.
세월이 흘러 현장 일에서 손을 떼고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린 늙은이가 되었지만 제 몸과 정신은 여전히 그 끔찍했던 30살의 여름날에 멈춰 서 있는 것만 같습니다. 평화롭게 길을 걷다가도 공사 현장에서 쇳덩이가 부딪치는 커다란 파열음이나 무언가 쿵 하고 무너지는 소리만 들려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널뛰기 시작하고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집니다.
멀리서 구급차 사이렌 소리만 어렴풋이 들려와도 그날의 비릿한 피 냄새와 매캐한 먼지 냄새가 코앞에 훅 끼치는 것 같아 그 자리에서 숨을 헐떡이며 주저앉을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다 지나간 과거일 뿐이라고 스스로의 뺨을 때려가며 수백 번 타일러 보아도 시각과 청각을 자극하는 아주 작은 단서 하나만 주어지면 제 이성은 완전히 마비되고 순식간에 죽음의 공포가 도사리는 그날의 공사판 한가운데로 끌려가 버립니다.
이런 지옥 같은 트라우마를 안고 살면서도 저는 평생을 제 가족들에게조차 이 사실을 철저하게 입막음한 채 비밀로 묻어두었습니다. 제가 살아온 시대의 남자들은 어떤 끔찍한 일을 겪든 겉으로는 태연하고 강인한 척 허세를 부리는 것이 진짜 사내다운 것이라고 강요받으며 살아왔으니까요. 행여나 아내와 자식들에게 신경 쇠약에 걸린 나약하고 쓸모없는 가장으로 보일까 봐 매일 밤 찾아오는 끔찍한 악몽을 술기운으로 억누르며 혼자서만 속을 시커멓게 태워왔습니다.
식구들이 다 잠든 새벽에 땀에 흠뻑 젖은 채 비명을 지르며 깨어날 때면 행여나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갈까 봐 제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 변기통을 부여잡은 채 숨죽여 오열했던 날들이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혼자서만 이 거대한 공포와 싸워내야 한다는 지독한 고립감이 사람의 속을 얼마나 까맣게 썩어 문드러지게 하는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를 겁니다.
젊고 힘이 넘칠 때는 억지로 몸을 혹사시키고 미친 사람처럼 일에 매달리며 억지로 그 기억들을 수면 아래로 짓눌러왔지만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해지니 이제는 그 얇은 방어막마저 맥없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입니다.
예전에는 1년에 몇 번 찾아오던 불면증과 공황 증세가 이제는 일상생활을 도저히 유지할 수 없을 만큼 빈번하게 저를 덮쳐옵니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산업 재해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젊은 노동자들의 소식만 접해도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고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져서 아예 뉴스를 보지 않은 지도 꽤 오래되었습니다.
제가 제 감정과 신체의 반응을 전혀 통제하지 못하고 망가져 간다는 사실이 너무나 비참하고 언젠가는 제 정신이 완전히 미쳐버려서 사랑하는 가족들조차 알아보지 못하게 될까 봐 덜컥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단 하루를 살다 죽더라도 남들처럼 길거리의 소음이나 구급차 소리에 심장이 내려앉지 않고 온전하게 숨을 쉬며 평온한 일상을 누려보고 싶은데 그 평범한 소망이 제게는 기적처럼 멀게만 느껴집니다.
다 늙어서 정신과에 찾아가 과거의 환영에 시달린다고 털어놓자니 그동안 억척스럽게 버텨온 제 인생 전체가 부정당하는 것 같아 차마 병원 문턱을 넘을 용기가 나지 않더라고요. 그렇다고 이대로 끔찍한 기억의 감옥에 갇혀 남은 노년의 시간들을 불안과 공포 속에서 갉아먹으며 비참하게 죽어갈 수는 없다는 절박한 심정이 들어 이렇게 용기를 내어 글을 적어봅니다.
저처럼 수십 년 동안 곪을 대로 곪아버린 오래된 외상후 스트레스도 진정으로 치유를 받고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세상에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요.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불쑥불쑥 저를 덮치는 이 지독한 공포의 발작을 스스로 가라앉히고 요동치는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실질적인 대처 방법이나 마음의 훈련법이 있다면 제발 저를 좀 살려주는 셈 치고 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날 사고 현장에서 허망하게 생을 마감했던 그 젊고 불쌍한 동생에게 평생토록 짊어지고 왔던 미안함과 죄책감을 덜어내고 제 마음속에서 편안하게 떠나보내 주고 싶습니다.
제가 죽어야만 이 끔찍한 고통의 사슬이 끊어질 것 같다는 극단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이제라도 상처 입은 제 자신을 따뜻하게 보듬고 용서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제 꼬여버린 마음의 매듭을 풀어야 할지 간절하게 조언을 구하고 싶습니다. 겉으로는 훈장처럼 번듯하게 살아남은 늙은 가장이지만 속은 갈기갈기 찢겨 피를 흘리고 있는 상처받은 영혼에게 부디 이 어둠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작은 희망의 등대를 비춰주시기를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