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 앞에서는 저를 깎아내리고 필요할 때만 찾는 이기적인 친구와 오랜 인연을 끊어냈습니다
수십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제 곁을 지켜주었다고 믿었던 오랜 친구와 얼마 전 아주 차갑고 단호하게 인연의 끈을 잘라냈습니다. 머리가 굵어지기 전 철없던 시절부터 함께 동네 골목을 누비고 성인이 되어 각자의 팍팍한 삶을 꾸려나갈 때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서로의 등짝을 두드려주던 그런 친구였습니다.
저는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무런 조건 없이 내 밑바닥까지 다 보여줄 수 있는 오래된 친구 하나쯤 곁에 두는 것이 성공한 인생이라고 굳게 믿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가 가끔 제 선을 넘는 무례한 행동을 하거나 이기적인 고집을 피울 때도 그저 저 친구의 타고난 성향이려니 하고 넓은 마음으로 다 이해하고 품어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수십 년을 켜켜이 쌓아온 익숙한 정이라는 것이 참 무서워서 어지간한 상처는 세월의 무게로 덮어버리며 묵묵히 그 관계를 유지해 왔는데 돌이켜보니 그것은 우정이 아니라 철저하게 저를 갉아먹는 잔인한 착취의 시간이었습니다.
그 친구의 가장 무섭고 소름 돋는 특징은 단둘이 있을 때와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있을 때의 태도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완벽하게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동창회나 지인들이 모인 다수의 자리만 가면 그 친구는 갑자기 저를 아주 우스운 사람으로 전락시켜 버립니다. 제가 과거에 겪었던 뼈아픈 실수나 남들에게 감추고 싶었던 경제적인 어려움 같은 예민한 문제들을 아무렇지 않게 술자리 안줏거리로 던져버리곤 했습니다.
남들이 다 듣는 앞에서 은근슬쩍 제 처지를 불쌍한 것처럼 포장하며 깎아내리고 그와 대비되는 자신의 현재 넉넉한 상황이나 자식들의 성공을 교묘하게 과시하는 패턴이 항상 반복되었습니다. 제가 표정이 굳어지며 불쾌한 기색을 보이면 오히려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쫀쫀하게 군다며 저를 속 좁은 사람으로 몰아세우곤 했습니다.
타인을 짓밟고 조롱하면서 자신의 알량한 우월감을 확인하려는 뒤틀린 우월 의식에 제가 아주 철저하고 완벽한 희생양으로 이용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겨진 것처럼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마음에 홀로 차 안에서 운전대를 부여잡고 분통을 터뜨린 날이 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남들 앞에서는 저를 형편없이 깎아내리며 무시하던 사람이 정작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거나 자신이 필요할 때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간곡하고 다정한 얼굴로 저를 찾아오곤 했습니다. 돈이 급하게 융통되어야 하거나 자신의 억울한 하소연을 들어줄 감정의 쓰레기통이 필요할 때면 어김없이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와 너밖에 없다며 달콤한 말로 제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평생 남에게 모진 소리 한번 제대로 못 하고 둥글게 살아온 제 멍청한 성격 탓에 저는 그럴 때마다 모질게 내치지 못하고 뻔히 속이 보이는 그 얄팍한 연기에 또다시 속아 넘어가 주었습니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그 무거운 책임감 때문에 바쁜 시간을 쪼개어 달려가 위로해 주고 제 주머니를 털어 밥과 술을 사 먹이며 그 친구의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했습니다. 자신의 필요가 채워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차갑게 돌아서서 저를 투명 인간 취급하는 그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뻔히 알면서도 수십 년의 인연이라는 거대한 환상에 갇혀 제 스스로가 저를 학대하는 꼴을 방치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결국 제 인내심의 한계가 산산조각이 나버린 결정적인 사건이 얼마 전에 있었습니다. 꽤 규모가 큰 지인들 모임 자리에서 그 친구는 제 가족의 아주 사적이고 아픈 가정사를 마치 재미있는 가십거리라도 되는 양 떠벌리기 시작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당황해서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수습하려 하는데도 그는 멈추지 않고 선을 훌쩍 넘는 막말을 쏟아냈습니다. 그 순간 제 머릿속에서 이성의 끈이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저는 그 자리에서 술잔을 내려놓고 짐을 챙겨 미련 없이 일어섰습니다.
밖으로 저를 따라 나온 그 친구는 미안하다는 사과는커녕 나이 먹더니 융통성 없이 왜 이리 예민하게 구느냐며 오히려 큰소리를 치며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더라고요. 그 분노에 찬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저는 그동안 제가 꽉 쥐고 있던 우정이라는 동아줄이 사실은 썩은 새끼줄에 불과했다는 것을 아주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상대방의 깊은 상처와 고통에 대해 단 한 톨의 공감 능력도 없이 오직 자기중심적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소름 돋는 이기심을 목격하고 나니 더 이상 이 관계를 유지해야 할 단 한 줌의 이유조차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제 지난 삶의 인간관계 전체를 찬찬히 되돌아보았습니다. 저는 그 친구에게 진정한 친구가 아니라 그저 그 사람의 돋보이는 무대를 위해 존재하는 한낱 우스꽝스러운 들러리이자 감정의 착취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저는 그 친구에게 구구절절 제 감정을 설명하거나 따져 묻는 일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숱하게 주고받았던 스마트폰 메신저의 대화방을 조용히 빠져나오고 전화번호를 완전히 차단해 버렸습니다.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세상에서 가장 차갑고 조용한 방식으로 제 인생에서 그 사람의 흔적을 영원히 도려내 버린 것입니다. 나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에게 내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단 1초도 낭비하지 않겠다는 제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결단이었습니다. 차단 버튼을 누르는 그 짧은 순간 지난 수십 년의 세월이 허공으로 흩어지는 것 같아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아파왔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크고 거대한 해방감이 제 온몸을 감싸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독하게 마음을 먹고 오랜 인연의 싹을 완전히 잘라내 버리고 나니 그 뒤에 찾아오는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의 파도 때문에 요즘 하루하루가 참으로 벅차고 혼란스럽습니다. 저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지독한 스트레스의 원인이 사라졌으니 매일매일 날아갈 듯이 기쁘고 통쾌해야 정상일 텐데 막상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일상 속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깊은 공허함과 씁쓸함이 밀려옵니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옛날 노래가 나오거나 우리가 함께 자주 가던 허름한 식당 앞을 지나칠 때면 저도 모르게 멈칫하며 그 시절의 추억들이 봇물 터지듯 밀려와 가슴을 턱턱 막히게 합니다. 비록 끝은 이렇게 진흙탕처럼 지저분하고 끔찍하게 끝나버렸지만 젊은 시절 춥고 배고팠던 시절을 함께 버텨냈던 그 눈물겨운 시간들마저 통째로 부정당하고 제 인생의 큰 조각 하나가 억울하게 떨어져 나간 것 같은 지독한 상실감과 허탈감이 수시로 저를 덮쳐와 숨을 고르기가 힘이 듭니다.
게다가 오랜 친구를 제 손으로 잔인하게 쳐냈다는 이면의 묘한 죄책감이 밤마다 저를 끈질기게 괴롭힙니다. 나이 든 사람들이 남들은 다 둥글게 참고 넘어가며 늙어가는데 나만 유독 옹졸하고 모나서 오랜 세월을 함께한 친구 하나 품어주지 못하고 이렇게 매몰차게 잘라낸 것은 아닐까 하는 스스로에 대한 끝없는 의심이 피어오릅니다.
혹시 내 대응이 너무 감정적이고 극단적이었던 것은 아닐까 그때 내가 한 번만 더 참고 조용히 넘겼더라면 적어도 지금처럼 주변 지인들 사이에서 불편한 눈치를 보며 껄끄러운 상황을 만들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부질없는 후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타인의 잘못된 행동을 명확하게 끊어낸 정당한 방어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관계를 파탄 낸 책임을 온전히 제 스스로에게 화살로 돌리며 갉아먹는 습관이 아직도 제 뼛속 깊이 남아 저를 괴롭히고 있는 것 같아 참으로 참담하고 괴롭습니다.
이 사건을 겪고 나니 이제는 남아있는 다른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마저 덜컥 겁이 나고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겉으로 나에게 다정하게 웃어주는 사람들도 뒤에서는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흉을 볼지 모른다는 극도의 불신감이 생겨버렸습니다. 누군가 다가와도 일단 마음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방어적인 태도로 먼저 선을 긋게 되니 스스로를 점점 더 외롭고 비좁은 고립의 섬으로 몰아넣고 있는 기분입니다.
평생 남에게 상처 주지 않고 배려하며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결국 돌아온 것은 처절한 배신감과 무너져 내린 자존감뿐이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서글픕니다. 제 스스로가 사람 보는 눈이 턱없이 부족하고 호구처럼 만만하게 보여서 이런 끔찍한 취급을 당했다는 자괴감 때문에 거울 속에 비친 제 늙고 지친 얼굴을 마주하는 것조차 몹시 괴롭고 화가 납니다. 상대방의 이기심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정작 상처받은 제 자신이 스스로의 가치를 바닥까지 깎아내리며 고통받는 이 억울한 모순을 도대체 어떻게 끊어내야 할지 눈앞이 캄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