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까지 십 년 가까이 같은 비밀번호를 사용하던 작은 서랍이 있었습니다. 보안 때문에 바꾸라는 말을 듣고 새 번호로 변경했어요. 지극히 평범한 일인데 바꾼 뒤로 자꾸 예전 숫자를 누릅니다.
비밀번호는 예전에 살던 집의 번지와 관련된 숫자였습니다. 가족도 모르는 저 혼자만의 규칙이었죠. 별로 소중한 물건을 넣는 서랍도 아니에요. 충전기나 오래된 서류 같은 게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번호를 바꾸는 순간 예전 집과 이어진 작은 습관 하나가 끊긴 기분이 들었습니다.
요즘은 이사도 자주 하고 쓰는 기기도 수시로 바뀝니다. 오래된 것을 간직하는 성격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어요. 필요 없으면 잘 버리고 새 물건 적응도 빠릅니다. 그런데 숫자 네 개는 이상하게 놓기가 어렵더군요.
어릴 때 그 집 현관 앞에 있던 금간 타일이 기억납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꼭 그 타일을 밟고 올라갔어요. 어느 날 생각해 보니 그 타일이 무슨 색이었는지는 기억나는데 그 집 안에 있던 가족들 목소리는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숫자라도 계속 가지고 있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며칠 전 새 비밀번호를 다시 변경할까 생각했습니다. 합리적인 이유는 없어요. 보안상으로는 지금 번호가 더 낫습니다. 그럼에도 옛 번호를 포기하면 오래된 저 자신도 조금 지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새 번호를 외우려고 종이에 몇 번 써봤습니다. 외우는 데 어려움이 있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네 숫자를 적을 때마다 예전 숫자가 한 번 더 머리를 지나갑니다. 그게 조금 아련합니다.
이런 사소한 물건이나 숫자에 과거를 붙들어두는 게 흔한 일일까요? 지나간 시간을 아끼는 마음과 현재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마음을 함께 가질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가족에게 말하면 숫자 네 개 가지고 무슨 고민이냐고 할 것 같아 여기 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