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직장 후배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전화를 받았는데, 통화를 끝내고 나서는 기분이 영 좋지 않더군요. 사람을 오래 알고 지냈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고, 제가 너무 순진하게 생각했나 하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 후배는 예전에 같은 직장에서 오랫동안 함께 일했던 사람입니다. 저보다 나이도 한참 어리고 처음 입사했을 때부터 이것저것 알려주며 챙겨줬던 기억이 있습니다. 업무 때문에 실수하면 대신 수습해 준 적도 있고, 개인적으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밥도 사주면서 이야기를 들어주곤 했습니다.
퇴직한 뒤에도 가끔 연락하며 지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뜸해졌습니다. 서로 사는 게 바쁘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거의 일 년 만에 연락이 왔으니 저도 반가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잘 지내시느냐며 안부를 묻더군요. 저도 반가워서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직장 생활은 괜찮은지 이것저것 물었습니다. 그런데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부탁할 일이 있어서 연락했다는 겁니다.
예전에 제가 알고 지내던 거래처 관계자에게 연락을 좀 해달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본인이 업무상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데 그쪽과 연결이 잘되지 않는다면서, 제가 예전 인연을 이용해 중간에서 이야기해 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솔직히 그 말을 듣는 순간 반가웠던 마음이 싹 가셨습니다. 오랜만에 연락한 이유가 결국 부탁 때문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거든요. 그래도 후배가 어려운 상황이라니 일단 무슨 일인지 들어봤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제가 쉽게 나설 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직장을 떠난 지도 오래됐고, 그 관계자와도 연락하지 않은 지 몇 년이 지났습니다. 괜히 제가 중간에 끼어들었다가 서로 곤란해질 수도 있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쪽 사정도 잘 모르고 예전처럼 영향력이 있는 것도 아니라며 어렵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후배가 선배님이 한마디만 해주시면 될 일인데 너무 조심하시는 것 아니냐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예전에는 후배들 부탁을 잘 들어주셨는데 많이 달라지셨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그 말이 참 서운했습니다. 제가 언제까지 후배들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 사람도 아니고, 제 사정을 설명했으면 이해해 줄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오히려 제가 미안한 마음이 들도록 이야기하니 기분이 상했습니다.
더구나 그동안 먼저 연락 한번 없다가 필요할 때가 되니 선배님을 찾는 모습이 좋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라는 사람이 반가운 게 아니라 제가 가진 인맥이 필요했던 것 같아 마음이 씁쓸했습니다.
물론 후배 입장에서는 예전에 도움을 받았던 선배니까 편하게 부탁할 수도 있었겠지요. 저도 젊었을 때 선배들에게 도움을 청한 적이 있으니 그 마음을 전혀 모르는 건 아닙니다. 다만 부탁을 거절했다고 사람까지 달라졌다는 식으로 말하는 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듭니다.
통화를 마친 뒤에도 한참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동안 제가 후배를 챙겨줬던 기억까지 괜히 초라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예전에는 서로 정이 있어서 잘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그때도 제가 도움이 되는 선배였기 때문에 가까이했던 건가 하는 의심까지 들더군요.
며칠 뒤 그 후배에게 다시 연락이 왔지만 선뜻 받기가 망설여졌습니다. 또 같은 부탁을 하려는 건 아닐까 싶어서요. 그렇다고 무작정 피하는 것도 나이 먹은 사람답지 못한 행동 같아 고민입니다.
앞으로도 예전 직장 인연을 통해 비슷한 부탁을 받을 수 있을 텐데, 정은 지키되 이용당하지 않는 관계를 만들려면 어떤 태도가 필요한지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