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한때 병원에서 일했었습니다.
태움 문화가 있다고는 들었지만 그게 제 이야기가 될 줄은 몰랐어요.
병원이라는 특수적인 환경이라 어느 정도의 긴장감과 업무 압박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심했습니다.
신규 때는 모르는 것도 많고 실수도 할 수 있으니까, 선배에게 혼나는 것도 배우는 과정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여보기도 했어요.
초반에는 제가 진짜 일을 못해서, 실수해서 혼나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어요. 저의 업무 방식을 지적하는게 아니고 점점 인신공격성, 면박 주기, 모멸감 주는 식으로 바뀌었거든요.
예를 들어 제가 해야 될 업무가 아닌, 본인의 업무를 "알아서 먼저" 도와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말 심한 말을 많이 들었어요.
넌 기본적인 센스가 없는 애다, 대체 인생을 어떻게 사는거냐, 집에서 그렇게 가르쳤냐는 패륜 비하까지..
전 그렇게 계속 주변 눈치를 봤고 늘 긴장했죠.
일적인 상황이 아닐 때에도 마찬가지였어요.
환자분과 대화하다 농담에 살짝 웃은 적이 있는데, 옆에 있던 선배가 갑자기 저에게 “웃어?”라고 하더라고요. 나중에 따로 불려가서는 본인은 웃어도 되지만 저는 웃으면 안 되는 연차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 연차도 마음대로 쓰기 어려웠어요. 특별한 사유가 있었고 대체할 인력까지 있었는데도 안 된다고 했고, 왜 안 되는지 제대로 된 이유를 들은 적도 없었습니다.
그냥 제가 연차를 쓰는 것 자체를 못마땅해하는 느낌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쉬고 싶어도 제대로 쉬지를 못했고, 결국 그게 쌓이면서 번아웃이 훅 왔던 것 같아요. 그냥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에 가시밭길이었어요.
번아웃이 오니까 지속적인 긴장 상태와 의욕상실이 동시에 찾아왔어요.
일을 잘하고 싶어서 버티던 사람이 의욕을 잃는 상태.
그게 제가 경험한 번아웃의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예전에는 퇴근하면 하고 싶은 것도 있고 주말에 약속을 잡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퇴근 후에는 좀비처럼 지냈어요.
그리고 제가 웃지 않는 사람이 되었더라고요.
뭘 봐도 재밌지가 않고 즐겁지가 않고... 웃으면 혼났던 기억 때문인지, 웃긴 상황에서도 괜히 웃음을 참게 되어서 그 시절 저는 웃음, 미소라는 게 사라져갔어요.
힘들다, 우울하다라는 감정을 넘어서 그냥 마음도 머리도 텅 빈 상태였어요. 무기력감이 극에 달하니 모든게 무미건조했어요. 일도 하기 싫어지고, 집에서도 아무것도 하기 싫어했어요.
이 번아웃 스트레스는 몸으로도 나타났어요. 가장 살이 빠지기 쉬운 게 맘고생이라고 하더니 살이 쭉쭉 빠지기 시작했어요.
전 원래 마른 체형이었는데 여기서 더 체중이 빠졌어요. 그런 저를 보고, 너 지금 살빠진거니? 어머 얘 힘들어서 살 빠졌나봐 이걸로 겨우? 내가 더 빠질게 해줄까? 하면서... 더 조롱의 대상이 되었죠.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남들 앞에서 조롱을 당하는 제 자신이었어요. 환자들 앞에서도 예외는 아니었거든요.
저에게 소리지르는 소리, 혼내는 소리, 조롱하는 소리가 환자들에게도 들려서, 환자분들이 절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조차 제가 느끼기까지 했을 정도니까요.
차라리 주변에 동료들만 있는 상황이었으면 제가 좀 더 견딜 수 있었을까요?
환자를 잘 돌보고 내가 맡은 사명감을 제대로 해내고 싶어서 시작했던 일인데, 어느 순간부터 환자보다도 오늘은 아무 소리도 듣지 않는 것,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것에 더 신경 쓰고 있는 제 모습을 발견하게 됐어요. 몸과 마음이 완전히 지쳐버렸습니다.
하지만 제가 바라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여느 때처럼 털리고 있던 날.
담당 환자분의 보호자분이 제가 혼자 있을 때 슥 다가오시더니 비닐봉지를 하나 건네주셨어요. 봉지 안에 들은 건 과일이었어요. "힘들죠? 내가 봐도 너무 힘들어보인다. 먹고 힘내요" 하시더라고요...
저는 감사합니다 라고 겨우 말하고 화장실에서 몰래 펑펑 울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또 걱정이 되더라고요.
울고 나면 눈이 빨개져서 사람들이 내가 울었다는 걸 알테고 그럼 또 뭐라고 할텐데.
이 순간에도 그런 걱정을 하는 제가 참 바보같고 안쓰럽더라고요. 그리고 그 순간에 결심을 했어요.
퇴사 결심이요.
이 상황을 벗어나 회복하는 최선의 방법은 퇴사라고 생각했어요.
일부 사람들은 의지가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에게는 계속 그 환경에 있는 것만으로는 회복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살기 위해 퇴사를 했고 결론적으로 이게 제가 번아웃에서 벗어나는 가장 효과가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제가 공부하고 그동안 해온 모든 것을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일자리에 재취업했습니다.
물론 일을 바꾼다고 곧바로 괜찮아진 건 아니었어요.
내 이전 경력을 버리고 완전히 다른 일을 해야 한다는 걱정과 두려움도 있었지만 그 환경에서 벗어나자 번아웃 증상이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어요.
새로운 일을 하면서 이전 직장에서 있었던 일과 전혀 다른 일을 하니까 예전 아픔은 잊고 새로운 환경에 집중할 수 있어서 그게 제일 좋았어요.
정말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어요. 새로운 걸 배우고 하나씩 해내면서 조금씩 자신감도 돌아왔고요. 그 과정에서 제 마음도 서서히 회복됐습니다. 이제 전처럼 덜 무기력하고, 예민함도 많이 줄었어요.
그리고 저는 취미를 가지기 힘든 사람이었는데, 새로운 취미를 하나씩 만들면서 이것도 번아웃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됐어요. 직장에서의 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가 좋더라고요.
일할 때의 나만 생각하지 않고 다른 것에 집중할 수 있으니까 마음도 조금씩 가벼워졌어요.
저처럼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번아웃이 온 분이라면, 너무 오래 참고 버티지만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힘들어도 무조건 버티는 게 답이 아닐 때가 있더라고요.
저도 당시에는 힘들어도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일을 그만두면 제가 지는 것 같았고, 여기서 버티지 못하면 제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그 환경에서 벗어나고 나니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제가 약해서 번아웃이 왔다기 보단, 계속 저를 소진시키는 환경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지쳐 있었던 거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저랑 비슷한 상황에 있다면 무조건 버티는 것만이 답은 아니라고 조심스럽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당장 퇴사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휴식을 제대로 확보하거나, 주변에 상황을 털어놓거나, 상담이나 병원의 도움을 받아보는 것도 좋아요!
꼭 퇴사가 아니더라도 나를 소진시키는 환경과 조금이라도 거리를 두는 방법을 찾아보셨으면 좋겠어요.
저 역시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고 모든 게 하루아침에 괜찮아진 건 아니었어요. 일의 어려움은 언제나 있어요.
하지만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일을 배우고, 다시 웃고, 퇴근 후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조금씩 예전의 저를 되찾았습니다.
힘든 환경에서 벗어나는 건 도망치는 것도, 내가 지는 것도 아니더라고요.
나를 지키기 위한 선택일 수도 있다는 걸 저는 번아웃을 겪고 나서야 알게 됐습니다.
적어도 내가 지금 너무 지쳐 있다는 사실만큼은 외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다른 일을 시작하면서 다시 제 생활을 찾았듯이, 각자에게 맞는 방법으로 조금씩 그 환경과 거리를 두다 보면 분명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보다 중요한 건 결국 그 일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