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괜찮다고 말하면 다들 정말 괜찮은 줄 압니다

저는 부탁받은 일을 잘합니다. 동료가 근무를 바꿔달라고 하면 가능한 날을 찾아주고, 집에서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제가 주문합니다. 해야 할 일이 눈앞에 있으면 몸이 움직여요. 그런데 제 일이 되면 멈춥니다.
​
지난달 건강검진 결과를 확인하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로그인해서 몇 분만 보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열어보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무서운 결과를 예상해서가 아닙니다. 그냥 제 상태를 확인하고 뭘 해야 할지 결정하는 과정이 버겁습니다.
​
친구가 요즘 어떠냐고 물으면 늘 괜찮다고 답해요. 실제로 그 자리에서는 괜찮습니다. 웃을 일에 웃고 밥도 먹으니까요. 다만 집에 와서 혼자 있으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느낌이 오래 남습니다. 누가 해달라고 하면 어떻게든 하는데 저를 위해서만큼은 동기가 생기지 않습니다.
​
며칠 전엔 동료의 서류를 한 시간 동안 같이 정리해줬습니다. 퇴근하자마자 제 책상 위에 쌓인 우편물을 봤는데 손도 안 댔습니다. 그때 제가 좀 낯설었어요. 남의 일을 돕는 건 가능한데 내 편지를 개봉하는 건 왜 이렇게 어렵지 싶었습니다.
​
이런 말을 하면 누군가는 책임감이 강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좋은 평가처럼 들리지만 저는 조금 다르게 느껴집니다. 책임감이 저를 위한 방향으로는 작동하지 않는 것 같거든요. 다른 사람이 실망하는 건 피하면서 정작 제가 저를 방치하는 일에는 둔감합니다.
​
요즘은 하루에 한 번 제 이름을 넣어 할 일을 적어봅니다. '나를 위해 우편물 한 개 열기.' 적고 나서 웃었어요. 이 정도를 목표로 삼아야 하나 싶어서요.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작은 일부터 시작해야 할 정도로 마음이 지쳐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
혹시 우울 상태에서는 남을 위한 활동은 유지하면서 자기관리만 눈에 띄게 줄어들 수 있나요? 멀쩡해 보인다는 이유로 도움을 미루는 중이라면 언제 상담이나 진료를 받아야 할지 알고 싶습니다. 괜찮다는 말이 제 상태를 설명하는 유일한 문장이 된 게 답답합니다.

hub-link

지금 우울증을 주제로 4.8만명이 이야기 중

댓글0

우울증 인기글

우울증 목록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