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들어오면 아직도 현관에 운동화부터 꺼내놓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별것 아닌 습관인데 저한테는 나름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집에 들어오면 신발장에 신발을 넣지 않고 현관에 운동화 한 켤레를 꼭 꺼내놓습니다.

그것도 바로 신을 수 있게 끈을 조금 느슨하게 풀어놓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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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현관이 지저분한 걸 싫어해서 신발은 바로 정리하는 편이었어요.

그런데 작년 겨울에 있었던 일 이후로 이런 습관이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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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 새벽에 저희 아파트에서 화재가 났습니다.

아래층에서 불이 났는데 당시 저희 가족은 모두 자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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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화재경보가 울려도 무슨 일인지 몰랐습니다.

가끔 오작동으로 경보가 울린 적이 있어서 그날도 그런 줄 알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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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조금 뒤에 복도에서 사람들이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내가 먼저 일어나서 현관문을 열어봤는데 연기 냄새가 난다고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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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이를 깨우고 겉옷을 챙기고 휴대폰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평소 같으면 금방 찾을 물건들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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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신발을 찾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아이 운동화가 신발장 아래쪽에 있었는데 급하게 꺼내려니 다른 신발이 걸리더라고요.

평소에는 몇 초면 될 일이었는데 그 순간에는 그 몇 초가 굉장히 길게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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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저희 가족은 모두 무사히 대피했습니다.

소방관분들이 도착해서 화재도 진압됐고 저희 집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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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생각하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죠.

그런데 이상하게 그날 이후로 제가 조금 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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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며칠 동안은 밤에 잠들기가 어려웠습니다.

불을 끄고 누우면 복도에서 들리던 발소리와 화재경보 소리가 생각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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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다가 조금만 이상한 소리가 들려도 벌떡 일어났습니다.

한번은 새벽에 세탁기 종료 알림이 울렸는데 순간적으로 침대에서 뛰어내린 적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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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도 비슷한 반응이 계속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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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현관문을 닫을 때 나는 소리가 싫어졌습니다.

아파트 복도에 있는 방화문이 닫히면서 쿵 하는 소리가 나면 저도 모르게 몸이 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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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로는 아무 일도 없다는 걸 압니다.

그런데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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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언제부터인가 현관에 운동화를 꺼내놓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운동화가 제자리에 없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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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아내가 현관 청소를 하면서 제 운동화를 신발장에 넣어놨습니다.

퇴근해서 집에 왔는데 운동화가 보이지 않더라고요.

그 순간 괜히 짜증이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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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한테 신발 왜 치웠냐고 조금 날카롭게 물었습니다.

아내는 현관이 지저분해서 넣어놓은 것뿐인데 왜 화를 내느냐고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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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그제야 제가 별것 아닌 일에 화를 냈다는 걸 알았습니다.

미안하다고 하고 그냥 넘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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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날 밤에는 다시 운동화를 꺼내놨습니다.

안 그러면 마음이 편하지 않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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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는 아이가 제 운동화를 보더니 물었습니다.

"아빠는 왜 신발을 맨날 이렇게 놔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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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빨리 신으려고 그런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자기도 그렇게 해놓으면 안 되냐고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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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듣는데 갑자기 마음이 좀 이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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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그날 일을 거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많이 놀랐지만 지금은 평소처럼 잘 지내고 있고, 화재 이야기가 나와도 저처럼 민감하게 반응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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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혹시 제가 계속 이런 행동을 하면서 아이한테도 불안감을 주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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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운동화뿐만이 아닙니다.

요즘은 외출해서 숙소에 들어가면 비상구 위치부터 확인합니다.

호텔이나 펜션에 가면 객실 문을 열고 복도를 한번 걸어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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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는 안전을 위해 좋은 습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확인을 하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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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가족 여행을 갔을 때도 그랬습니다.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비상구 위치를 확인하고 소화기가 어디 있는지까지 살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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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밤에 누우니까 다시 걱정이 되더라고요.

혹시 화재경보를 못 들으면 어떡하지.

아이를 깨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면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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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잠들기 전에 현관 쪽을 두 번이나 확인했습니다.

아내는 이제 그만하고 자라고 했습니다.

저도 그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자꾸만 확인해야 할 것이 남아 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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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는 이런 이야기를 잘 하지 않습니다.

그날 화재를 겪은 가족이나 이웃들도 지금은 대부분 평범하게 지내고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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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당시 이야기가 나오면 다들 큰일 날 뻔했다면서 웃으며 지나갑니다.

저도 그 자리에선 같이 웃습니다.

그런데 집에 와서는 그날 일을 다시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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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아이 신발을 꺼내던 순간이 자꾸 떠오릅니다.

왜 하필 그 장면만 그렇게 선명하게 기억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날 있었던 다른 일은 순서도 잘 기억나지 않는데 신발장 문을 열고 급하게 운동화를 꺼내던 장면만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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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실제로 불이 날까 봐 무섭다기보다 그때처럼 제가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할까 봐 두려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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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미리 준비하고 자꾸 확인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준비한다고 해서 마음이 완전히 편해지는 것도 아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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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는 아내가 이제 집도 안전하고 다 끝난 일인데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저도 그날 일이 이미 끝났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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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은 그날 새벽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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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증상이 PTSD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을까요?

아직 정확한 진단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

일상생활을 못 할 정도는 아니지만, 별다른 이유 없이 그날 일이 떠오르거나 특정 소리에 지나치게 놀라는 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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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비슷한 경험을 하신 분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행동이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나요?

아니면 일상생활이 가능하더라도 전문적인 상담이나 진료를 받아보는 게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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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저도 제가 너무 예민하게 구는 것 같아서 답답합니다.

운동화를 현관에 꺼내놓는다고 누가 크게 피해를 보는 것도 아니고, 비상구를 확인하는 것도 나쁜 행동은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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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예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하던 일들을 이제는 불안해서 해야 한다는 게 좀 다르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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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현관에 운동화가 없어도 아무렇지 않게 잠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대단한 걸 바라는 건 아닙니다.

그냥 집에 돌아오면 내일 출근할 생각이나 하고, 주말에 뭐 할지 고민하던 예전의 평범한 생활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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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니엄마
    작성자님, 그날 얼마나 놀라고 두려우셨을지 글을 읽으며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모두가 잠든 새벽, 가족을 데리고 급하게 대피해야 했던 순간은 무사히 지나갔다고 해서 마음까지 곧바로 끝나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특히 아이의 신발을 꺼내던 장면이 아직도 선명하다는 말씀에서, 그때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절박함이 얼마나 컸을지 느껴집니다.
    
    운동화를 현관에 꺼내놓고 비상구를 확인하는 것도 어쩌면 다시는 그때처럼 당황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이겠지요. 그러니 스스로를 너무 예민하다고 탓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머리로는 끝난 일이라는 걸 알아도 마음과 몸은 아직 그날의 두려움을 기억하고 있을 수 있으니까요.
    
    다만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특정 소리에 놀라고, 반복해서 확인해야 마음이 놓이며, 예전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신다면 전문적인 상담이나 진료를 받아보셔도 좋겠습니다. PTSD와 관련된 반응일 수도 있지만, 글만으로 단정할 수는 없으니까요. 일상생활이 가능하다는 이유로 혼자 견디실 필요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작성자님이 바라시는 건 단순히 운동화를 신발장에 넣는 일이 아니라, 더는 불안에 대비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한 마음을 되찾는 일이겠지요.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할지 이해됩니다.
    
    그날의 두려움이 작성자님의 잘못은 아니듯, 아직 마음이 그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잘못이 아닙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애쓰셨던 그 마음만큼 이제는 작성자님의 마음도 돌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현관의 운동화를 확인하지 않고도 편안하게 잠드는 밤이 다시 찾아오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 익명1
    불안 때문에 평범했던 일상까지 신경 쓰게 되면 마음이 많이 지치실 것 같아요
    조금씩 불안에서 벗어나 예전처럼 편안한 하루를 보내실 수 있기를 바라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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