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90년대 한창 젊었을 적에는 안전모니 안전줄이니 그런 거 챙길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저 하루 벌어 처자식 입에 풀칠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흙먼지 날리는 공사판을 겁 없이 누비고 다녔습니다. 까마득하게 높은 아시바(비계) 위를 널빤지 하나에 의지해서 걸어 다녀도 무서운 줄 몰랐던 시절이었죠. 다들 그렇게 목숨 내놓고 악으로 깡으로 일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20년도 훌쩍 넘은 그 옛날의 끔찍한 기억이 다 늙어빠진 요즘 들어 자꾸 제 목을 조릅디다.
그때 저랑 제일 친하게 지내며 형 동생 하던 동료가 제 눈앞에서 추락하는 걸 봤거든요. 크레인으로 철근을 끌어올리다 줄이 터지면서 그 무거운 쇳덩이들이 그 친구가 서 있던 곳을 덮쳤습니다. 어! 하는 짧은 비명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지던 그 모습, 그리고 시멘트 바닥에 번지던 검붉은 피. 그날의 끔찍한 쇳소리와 비릿한 냄새가 아직도 코끝에 생생합니다.
당시에는 산재 처리도 제대로 안 되던 험한 세상이라, 장례식장에서 소주통을 비우며 엉엉 울고는 다음 날 또 살기 위해 그 피 묻은 현장으로 출근해야 했습니다. 먹고살기 바빠서 가슴 한구석에 쇳덩이처럼 묻어두고 평생을 잊은 줄 알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현역에서 물러나고 집에 가만히 앉아 쉬다 보니, 그 무서운 기억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저를 괴롭힙니다.
가끔 티비에서 건설 현장 사고나 끼임 사고 같은 뉴스가 나오면 저도 모르게 숨이 턱 막힙니다. 텔레비전 화면을 볼 수가 없어서 황급히 채널을 돌려버리는데, 그러면 벌써 손발이 차가워지고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립니다. 동네를 걷다가 공사장에서 나는 '쾅' 하는 쇳소리만 들어도 그날의 기억이 어제 일처럼 덮쳐와서,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식은땀을 뻘뻘 흘린 적도 있습니다. 내 몸이 내 맘대로 통제되지 않는 이 극도의 불안감이 늙어가는 사람을 참 비참하게 만듭니다.
평생을 거친 현장에서 뼈가 굵은 놈인데, 이제 와서 트라우마니 뭐니 하며 앓는 소리를 내는 게 제 스스로도 참 주책맞고 찌질하게 느껴집니다. 자식들이나 아내한테는 말해봤자 쓸데없는 걱정만 시킬까 봐 입을 꾹 닫고 있는데, 밤에 자다가도 그 친구 얼굴이 떠올라 소스라치게 놀라 깨는 날이면 베란다로 나가 찬 바람을 맞지 않고는 도저히 다시 잠을 청할 수가 없습니다.
처자식 건사하겠다고 버텼던 세월의 훈장 치고는 이 마음의 병이 너무 무겁고 잔인합니다. 30년을 꾹꾹 눌러 담았던 이 현장의 공포가 왜 다 늙은 지금에서야 저를 이렇게 흔들어 놓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