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 부모님 집에 갔다가 조금 이상한 걸 발견했습니다.
아버지가 냉장고 옆에 작은 메모지를 붙여놓으셨는데 거기에 제 이름하고 전화할 시간이 적혀 있더라고요.
'평일 낮에는 전화하지 말기.'
'토요일 저녁 7시 이후.'
'전화 안 받으면 다시 걸지 말고 기다리기.'
처음에는 이게 뭔가 싶었습니다.
아버지한테 물어보니까 제가 회사 다니느라 바쁘니까 괜히 방해하지 않으려고 적어놓으셨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40대 중반이고 아버지는 올해 일흔셋이십니다.
부모님 두 분 다 건강하시고 따로 살고 있지만 한 달에 한두 번은 찾아뵙습니다.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고 특별히 서먹한 관계도 아닙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몇 달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그날 회사에서 정신없이 일하고 있는데 아버지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혹시 무슨 일인가 싶어서 받았더니 집에 있는 TV가 자꾸 꺼진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제가 퇴근하고 확인해 보겠다고 했는데 아버지가 이것저것 계속 물어보시더라고요.
결국 저도 모르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버지, 저 지금 일하고 있어요. 급한 일 아니면 저녁에 전화하시면 안 돼요?"
아버지는 알겠다고 하시고 바로 끊으셨습니다.
그날 저녁에 제가 다시 전화해서 TV 문제도 해결해 드렸고 평소처럼 대화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말을 기억하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솔직히 메모를 처음 봤을 때는 미안한 마음보다 조금 민망한 기분이 먼저 들었습니다.
제가 그렇게까지 무섭게 이야기했나 싶기도 하고, 꼭 저런 걸 적어놓으셔야 하나 싶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 보니 아버지가 요즘 먼저 전화하시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예전에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전화하셔서 별것 아닌 이야기도 하셨거든요.
동네 마트에 새로 뭐가 들어왔다거나, 예전에 제가 좋아하던 반찬을 어머니가 만드셨다는 이야기 같은 것들이요.
당시에는 그런 전화가 별로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몇 달 동안은 제가 먼저 전화하지 않으면 연락이 거의 없었습니다.
저는 아버지도 이제 휴대폰으로 이것저것 하시느라 바쁘신가 보다 하고 생각했어요.
며칠 전에 일부러 평일 저녁에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잘 지내시냐고 물었더니 별일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무슨 일 있냐고 되물으시기에 그냥 생각나서 전화했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웃으면서 그러셨습니다.
"별일도 없는데 왜 전화를 했노."
그 말을 듣고 저도 웃었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나니까 좀 묘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먼저 전화하실 때는 제가 바쁘다는 이유로 빨리 끊으려고 했으면서, 제가 전화했을 때는 아버지가 반갑게 받아주시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참 제멋대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아버지가 근무시간에 별일 아닌 걸로 자주 전화하시면 조금 부담스러울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저한테 전화하기 전에 요일과 시간을 확인해야 하는 관계가 된 건 싫습니다.
두 가지 마음이 같이 드는 거예요.
그렇다고 지금 와서 아버지한테 아무 때나 전화하셔도 된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실제로 제가 바쁠 때는 전화를 못 받을 수도 있고, 그러면 괜히 또 아버지가 눈치를 보실 것 같거든요.
며칠 전에는 아버지한테 작은 선물이라도 하나 보내드릴까 하다가 그만뒀습니다.
제가 미안한 마음을 덜려고 갑자기 잘해드리는 것 같아서요.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자니 냉장고 옆에 붙어 있던 그 메모가 자꾸 생각납니다.
사실 아버지가 저한테 특별히 서운하다고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회사에서 바쁘게 지내는 걸 이해한다고 늘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이해라는 게 혹시 저한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아버지가 혼자 조심하고 계신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아이를 키우는 입장인데 언젠가 제 아이가 다 커서 저한테 전화할 수 있는 시간을 따로 정해준다면 어떤 기분일까 싶기도 하고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식이 성인이 되면 부모와 연락하는 방식도 달라지는 게 당연하지 않나 싶습니다.
서로의 생활이 있고 지켜야 할 시간도 있으니까요.
제가 궁금한 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게 좋을지입니다.
아버지께 그때 짜증 냈던 일을 다시 꺼내서 사과하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굳이 지난 일을 이야기하지 않고 앞으로 제가 먼저 연락을 자주 드리는 게 더 나을까요?
무엇보다 제가 죄책감을 느낀다고 해서 갑자기 연락을 자주 드리다가 얼마 못 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까 봐 그것도 걱정입니다.
부모님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상대방이 눈치 보지 않는 관계를 만드는 게 생각보다 어렵네요.
지금까지는 부모님과 별문제 없이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편하게 지내는 동안 아버지는 저한테 전화 한 통 하는 것도 신경 쓰고 계셨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그 메모를 그냥 떼어버리라고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차마 그러지는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저한테 편하게 전화하실 수 있게 하려면 메모를 없애는 것보다 제가 먼저 달라져야 할 것 같기도 하고요.
이런 경우에는 어떤 식으로 관계를 조금씩 바꿔가는 게 좋을까요?
괜히 미안한 마음에 이것저것 하려다가 오히려 아버지를 더 불편하게 만드는 건 아닐지 고민입니다.
아버지 전화가 싫었던 건 아니라는 말을 꼭 전해야겠어요. 오늘은 먼저 전화드려 사과하고 안부도 여쭤보려고요. 따뜻하게 마음 짚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