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싫은 건 아닌데 가끔 모든 관계에서 사라지고 싶어집니다
사람들이랑 크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에요.
직장에서도 그냥 무난하게 지내는 편이고 오래된 친구들도 있고 가족들이랑도 사이가 나쁘진 않습니다. 최근에 누구랑 크게 싸웠거나 인간관계 때문에 심하게 상처받은 일도 없고요.
그런데 가끔 아무한테도 연락받지 않고 며칠 정도 그냥 조용히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휴대폰도 꺼놓고 싶고 단톡방도 다 나가고 싶고, 아무한테도 제가 지금 뭐 하고 있는지 말 안 해도 되는 곳에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에는 그냥 제가 피곤해서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몸이 피곤할 때보다 사람들과 계속 연결돼 있다는 느낌이 들 때 더 그런 것 같더라고요.
메시지가 오면 답장을 해야 할 것 같고, 누가 만나자고 하면 날짜를 잡아야 할 것 같고, 오랜만에 연락이 오면 반갑게 답해야 할 것 같고요.
가족이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면 또 괜찮다고 설명해야 할 것 같고요.
사실 아무도 저한테 꼭 그렇게 하라고 한 적은 없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저는 늘 누군가에게 계속 반응해줘야 하는 사람처럼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는 친한 친구한테 메시지가 하나 왔는데 별 내용도 아니었어요.
평소 같으면 그냥 바로 답했을 텐데 그날은 화면에 친구 이름 뜨는 걸 보자마자 갑자기 피곤하다는 생각부터 들더라고요.
그 친구가 싫은 것도 아니에요.
오히려 정말 좋아하는 친구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했어요.
좋아하는 사람 연락도 귀찮게 느껴지면 내가 사람 만나는 것 자체가 싫어진 건가 싶기도 했고요.
결국 몇 시간 있다가 평소처럼 답장했고 대화도 잘했습니다.
친구는 제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걸 전혀 몰랐을 거예요.
그런데 대화가 끝나고 나니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나는 혼자 있고 싶은 마음까지 눈치를 보고 있지 싶더라고요.
생각해보면 저는 인간관계에서 원래 좀 이런 편인 것 같아요.
연락이 오면 웬만하면 답하고, 분위기가 어색하면 제가 먼저 말을 꺼내는 편이고, 상대방 표정이 안 좋아 보이면 혹시 제가 뭐 잘못했나 생각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랑 있을 때는 별로 힘들다는 생각을 안 하는데 집에 돌아오면 갑자기 아무 말도 하기 싫고 조용히 있고 싶은 날이 있어요.
누군가가 싫어서 혼자 있고 싶은 것보다는 그냥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필요한 느낌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또 실제로 연락을 끊고 지내지는 못하겠어요.
답장을 늦게 하면 상대가 서운해하지 않을까 싶고, 모임에 몇 번 빠지면 사람들이 저를 멀리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피곤해도 계속 연락하고 관계를 유지해요.
그러면서 속으로는 또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요.
저도 이게 좀 모순적인 것 같아요.
아무도 저를 찾지 않으면 외로울 것 같은데, 또 계속 사람들이 찾으면 도망가고 싶습니다.
예전에는 친한 사이일수록 자주 연락하고 자주 만나고 속마음도 많이 얘기해야 좋은 관계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꼭 그래야 하나 싶어요.
좋아하는 사람이더라도 가끔은 거리를 두고 싶을 수도 있고, 친한 사이에서도 며칠 정도 연락 안 하고 지낼 수 있는 거 아닌가 싶고요.
제가 원하는 건 인간관계를 끊는 게 아니라,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혼자 있을 수 있는 여유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적당한 거리를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제가 편한 만큼 거리를 두면 상대는 서운할 수도 있고, 상대가 원하는 만큼 맞춰주다 보면 저는 다시 지칠 것 같거든요.
사람이 싫은 건 아닌데 가끔 모든 연락에서 잠깐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그냥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걸까요
정성스럽게 제 마음을 짚어주셔서 감사해요. 관계를 끊고 싶은 게 아니라 제 속도로 연결될 여백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말씀처럼 작은 것부터 응답의 자율성을 연습해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