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딜 가든 분위기 좀 띄우는 편이에요. 말도 많고 농담도 자주 하고요. 회사에서도 친구들 사이에서도 대체로 웃기는 담당이에요. 일부러 웃기려고 애쓰는 건 아니고, 원래 사람들이랑 얘기하는 걸 좋아하고 어색한 분위기를 잘 못 견디는 성격이거든요.
근데 얼마 전부터 이게 좀 피곤해졌어요.
지난주에 회사 동료들이랑 점심을 먹었는데, 기분이 안 좋은 것도 아니고 그냥 조용히 밥만 먹고 싶은 날이었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 얘기 들으면서 밥만 먹고 있었는데 한 명이 "오늘 왜 이렇게 조용해? 어디 아파?" 하더라고요. 아니라고 했더니 옆에서 "쟤 조용하면 진짜 무슨 일 있는 거야" 해서 다들 웃었어요. 저도 같이 웃고 넘겼는데 이상하게 그 말이 계속 기분 나빴어요. 내가 조용한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 싶어서요.
생각해보니까 비슷한 일이 꽤 많았어요. 친구들 만나서 제가 말을 좀 적게 하면 꼭 무슨 고민 있냐고 물어보고, 어떤 친구는 "너 오늘 컨디션 왜 그래, 분위기 안 사네" 이런 소리도 했고요. 그럴 때마다 괜히 제가 뭘 잘못한 기분이 들어요.
그래서 할 말이 없어도 일부러 농담을 하게 돼요. 생각나는 게 없으면 누구 놀리기도 하고, 분위기 가라앉으면 괜히 목소리 키워서 장난치고요. 그러면 다들 웃고 다시 평소처럼 돌아가요. 근데 집에 오면 가끔 허무해요.
얼마 전에 모임 끝나고 오늘 내가 무슨 얘기를 했지 떠올려봤는데, 웃겼던 농담 몇 개는 기억나는데 정작 요즘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얘기한 건 하나도 없더라고요. 친구들이 제 얘기를 듣기 싫어하는 건 아닐 거예요. 근데 제가 진지한 얘기를 꺼내면 다들 약간 어색해하는 느낌이 있어요.
한번은 "요즘 회사 다니는 게 좀 재미없다" 했더니 친구 하나가 "야, 너까지 그러면 우리 모임은 누가 웃기냐" 하는 거예요. 농담인 건 아는데, 그 자리에선 저도 웃었는데, 집에 오는 길에 그 말이 계속 생각났어요. 내가 언제부터 웃겨야 하는 사람이 됐지 싶고요.
며칠 전엔 더 이상한 일도 있었어요. 오래 알고 지낸 지인이랑 둘이 커피를 마셨는데 그날따라 제가 말을 별로 안 했어요. 그냥 그 사람 얘기 듣고 가끔 대답하는 정도였는데, 헤어질 때 "무슨 걱정 있어? 너답지 않아서 좀 걱정됐어" 하는 거예요. 순간 짜증이 확 났어요. 걱정해주는 사람한테 짜증 난 것 자체가 좀 어이없긴 한데, 그냥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 가끔 조용히 있으면 안 되나? 맨날 웃고 떠들고 분위기 띄워야 나다운 건가?
그렇다고 제가 원래 조용한 사람인데 억지로 밝은 척하면서 산 건 아니에요. 평소에 웃고 떠드는 것도 분명 진짜 제 모습이에요. 문제는 이제 그 모습만 보여줘야 할 것 같다는 거예요.
가끔은 그냥 말없이 앉아 있고 싶어요. 누가 웃긴 얘기 하면 웃고, 할 말 없으면 가만히 있고요. 근데 그러면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까 매번 이유를 설명해야 하고, 요즘은 그게 귀찮아서 그냥 평소처럼 하는 게 편하겠다 싶을 때도 있어요.
솔직히 제 책임도 있다고 생각해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분위기 어색해지면 제가 먼저 나서고, 사람들이 웃으면 뿌듯해하고 그랬거든요. 관심받는 게 좋았던 것도 사실이고, 모임에서 "너 꼭 와야 돼" 하면 기분 좋았고요. 근데 요즘은 사람들한테 내가 어떻게 기억되느냐보다 같이 있을 때 내가 얼마나 편하냐가 더 중요해졌어요.
얼마 전엔 일부러 모임에 안 갔어요. 다른 약속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그날은 여러 사람 앞에서 웃고 떠들 자신이 없었어요. 친구가 왜 안 나오냐고 연락 왔길래 피곤해서 쉰다고 했더니 "너 없으면 재미없는데" 하고 답이 왔어요. 예전 같으면 기분 좋았을 말인데 그날은 이상하게 부담스럽더라고요.
그 친구들 좋아해요. 오래 알았고 앞으로도 계속 보고 싶은 사람들이에요. 근데 제가 조용해져도, 농담 안 해도, 재미없는 사람이 돼도 지금처럼 편하게 지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아무도 저한테 웃기라고 강요한 적 없는데, 저 혼자 그 역할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냥 사람 많이 만나서 지친 건지, 나이 들면서 인간관계에서 원하는 게 달라진 건지도 잘 모르겠어요. 밝고 재밌는 사람으로 봐주는 건 고마운데, 그 이미지가 가끔은 벗을 수 없는 옷 같아요.
혹시 저처럼 원래 밝고 말 많은 사람이었다가 어느 순간 그게 부담스러워지신 분 계신가요? 그냥 좀 조용하게 지내면서 사람들이 익숙해지길 기다리는 게 나을까요, 아니면 "나 요즘 좀 조용히 지내고 싶어" 하고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나을까요? 그런 걸 굳이 설명해야 하는 것도 좀 웃기긴 한데요.
가끔은 제가 아무 말도 안 해도 누가 그냥 옆에 앉아서 자기 할 일 했으면 좋겠어요. 웃기려고 하지도 않고, 무슨 일 있냐고 묻지도 않고요. 생각해보면 저는 사람들한테 외면받는 게 싫은 것보다, 기대하는 모습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게 더 싫은 것 같아요.
그냥 말 많은 날도 있고 조용한 날도 있는 사람으로 지내고 싶은데, 생각보다 어렵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