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도 제법 선선해지고 이제 진짜 가을인가 싶어서 어제는 큰맘 먹고 옷장 정리를 좀 시작했어요.
요새는 무릎도 시큰거리고 딱히 예쁘게 차려입고 나갈 화려한 모임도 확 줄어들었잖아요?
기껏해야 동네 마트 가거나 복지관 잠깐 들르는 게 전부라, 맨날 입는 편한 고무줄 바지에 헐렁하고 품 넉넉한 티셔츠만 찾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옷장 속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안 입는 옷들을 이번 기회에 싹 다 버려야겠다 다짐하고 커다란 100L짜리 쓰레기봉투까지 옆에 딱 펴놓고 벼르던 옷장 문을 열었거든요?
근데 막상 옷무더기를 바닥에 다 꺼내놓고 보니까 이게 참 마음처럼 쉽게 버려지지가 않네요...
구석에서 한 10년, 15년 전에 입었던 버건디색 투피스 정장이랑 실크 블라우스를 꺼냈는데, 그때 참 큰맘 먹고 백화점에서 비싸게 주고 샀던 기억이 너무 생생하게 나는 거예요.
애들 대학 입학식 때도 자랑스럽게 입고 가고, 친척들 결혼식이나 중요한 가족 모임 있을 때마다 참 예쁘게 잘 입고 다녔던 옷이거든요... 그땐 지금보다 살도 훨씬 덜 찌고 허리도 꼿꼿해서 그 옷 입고 립스틱만 살짝 발라도 주변에서 참 곱다는 소리도 꽤 들었는데 말이에요.
버리기 전에 혹시나 싶어서 방문을 닫고 슬쩍 한 번 입어봤는데 아유.. 지퍼가 등 중간에서 꽉 막혀서 반도 안 올라가더라고요...
억지로 잠가보려다 옷이 터질 것 같아 얼른 벗었어요. 나이 들면서 두꺼워진 허릿살이랑 팔뚝 살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거울 속에 비친 푸석하고 주름진 얼굴이랑 그 화사한 옛날 옷이 묘하게 엇박자가 나서 너무 안 어울리더라고요.
혼자 거울 앞에서 피식 헛웃음이 나더라구요. 옷감은 아직도 이렇게 짱짱하고 고운데 그 옷을 입던 젊고 생기 있던 나는 온데간데없고, 웬 낯선 할머니 한 명이 어정쩡하게 서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참 이상했어요.
결국 지금 내 몸에도 안 맞고 앞으로 입고 나갈 데도 없는 옷이니까 미련 없이 버리는 게 맞는데, 그 옷을 헌 옷 수거함이나 쓰레기봉투에 휙 처넣으려고 하니까 손이 안 떨어지는 거예요.
꼭 내 찬란했던 청춘이랑 반짝반짝 빛나던 젊은 시절의 추억들까지 전부 다 쓰레기 취급해서 내다 버리는 것 같았거든요. 이 옷 입고 남편이랑 모처럼 기분 좋게 외식하며 웃었던 날, 애들 졸업식에서 꽃다발 안겨주며 활짝 웃고 사진 찍었던 그 시절들이 옷깃마다 고스란히 묻어 있는 것 같아서요.
유행 지난 바바리코트, 무릎 튀어나온 청바지, 색 바랜 실크 스카프 하나하나에 다 제 사연이 있고 제 젊은 날의 치열했던 땀과 눈물이 배어 있는 것 같아 차마 버리기가 너무 아깝고 짠한 마음마저 들었네요.
결국 버리겠다고 야심 차게 꺼내놓은 옷들 중에 진짜 구멍 난 것 몇 개만 버리고 절반 이상을 도로 차곡차곡 개서 옷장 깊숙한 곳에 다시 밀어 넣고 말았어요.
남편이 퇴근하고 와서 보더니 어차피 1년 내내 입지도 않을 옷을 뭐 하러 또 이고 지고 사냐고, 집 좁아지게 궁상 좀 떨지 말라고 핀잔을 주더라고요. 평소 같으면 그냥 웃어넘겼을 텐데 그 말에 왠지 울컥해서 내가 내 물건 간수하겠다는데 왜 참견이냐고 괜히 팩 짜증을 내버렸어요.
남자들은 이런 여자들의 복잡하고 헛헛한 마음을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거예요. 옷장 정리를 한 건지 만 건지 어질러진 방바닥에 덩그러니 주저앉아 있는데 훌쩍 지나가 버린 세월이 너무나 야속하고 내 인생도 어느새 이렇게 저물어가나 싶어서 한참을 멍하니 허탈하게 앉아있었답니다.
나이 60대를 넘어가니까 이제는 비싼 새 옷 사는 재미보다 예전 옷들 만지작거리며 지나간 추억을 먹고 사는 일이 더 많아지는 것 같아요.
저만 이렇게 미련스럽게 옛날 옷들을 못 버리고 껴안고 사는 건가요?
동네 친구들 보면 미니멀 라이프니 뭐니 하면서 다 갖다 버린다던데 저는 왜 이렇게 옷 하나 버리는 것도 아쉽고 섭섭한지 모르겠어요.
다들 옷장 정리하실 때 안 입는 옷들 미련 없이 싹싹 잘 비워내시는지 궁금해요.
저처럼 옷 하나에 젊은 시절 추억 떠올리면서 버릴까 말까 수십 번 망설이고 마음 한구석 뻥 뚫린 것처럼 허전해지는 분들이 또 계실지 모르겠네요.
가을바람이 불어서 유독 마음이 헛헛한 건지, 그냥 답답한 마음에 주저리주저리 적어봤어요.
다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하고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코치님 덕분에 고민이 해결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