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현역에서 뛰고 돈 벌 때는 주말마다 동창이나 옛날 친구들 만나는 게 참 좋았습니다. 다들 사회에서 한자리씩 차지하고 바쁘게 살던 시절이니, 오랜만에 만나면 반가운 마음에 삼겹살에 소주잔 기울이면서 스트레스 푸는 게 유일한 낙이었죠.
기분 좋게 취하면 서로 자기가 밥값 계산하겠다고 카운터에서 지갑 꺼내 들고 실랑이를 벌이는 것도 그때는 다 사람 사는 끈끈한 정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나이 먹고 은퇴하면 남는 건 옆에 있는 마누라랑 속 편한 친구놈들밖에 없다고 굳게 믿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은퇴를 하고 몇 년 지나고 보니, 그 좋았던 친구들 모임에 나가는 게 점점 껄끄러워지고 발걸음이 무거워제기 되더군요. 오랜만에 만나면 처음 한두 시간이야 반갑고 좋지만, 자리에 앉아서 술이 몇 잔 돌고 나면 나오는 이야기 레퍼토리가 매번 똑같습니다.
"내가 옛날에 그 프로젝트 책임자일 때는 말이야", "내가 현장 소장할 때 밑에 직원들이 내 눈치 보느라 어땠고" 하면서 허구한 날 왕년의 잘나갔던 시절 이야기만 앵무새처럼 반복합니다.
그거 아니면 자식들이 이번 명절에 용돈을 몇백만 원 줬다느니, 며느리가 비싼 건강식품을 사 왔다느니, 주말에 비싼 돈 주고 골프를 치러 갔다느니 하는 자랑뿐입니다. 다들 머리 허옇게 늙어가고 주머니 사정 뻔해지는 마당에 굳이 저렇게까지 포장하며 과시해야 하나 싶어 속으로 참 씁쓸해집니다.
내 처지랑 은근히 비교가 돼서 괜히 주눅 들 때도 있고, 겉으론 웃으면서 "아이고 대단하네, 자식 농사 잘 지었네" 하고 억지로 맞장구쳐주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진짜 진이 다 빠집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모임 나가기 꺼려지는 제일 큰 이유는 바로 밥값입니다.
예전처럼 매달 통장에 꼬박꼬박 월급이 꽂히는 것도 아니고, 다들 쥐꼬리만 한 국민연금이나 모아둔 노후 자금 조금씩 까먹으면서 사는 처지잖습니까? 요새 물가가 하도 올라서 고깃집에서 밥 먹고 술 한잔 얼큰하게 하고 나면 몇십만 원은 우습게 나오더군요. 그걸 몇만 원씩 갹출을 하거나 누군가 한 명이 기분 좋게 쏴야 하는데, 그 돈이 이제는 너무 아깝고 덜컥 겁이 납니다.
계산할 때쯤 되면 분위기가 참 묘해집니다. 예전처럼 서로 자기가 내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고, 은근히 서로 눈치를 보거나 갑자기 전화받는 척 밖으로 나가는 놈, 화장실 가는 척하며 시간을 끄는 모습들이 뻔히 보입니다.
저 역시도 주머니에서 선뜻 지갑이 안 나오고 '오늘은 누가 내나' 눈치만 보고 있는 제 자신이 너무 찌질하고 궁상맞게 느껴집니다. 돈 몇만 원에 인상 찌푸리고 주판알 튕기고 있는 늙은이 꼴이라니, 모임 끝나고 지하철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 참 허탈하고 비참하기 짝이 없습니다.
젊을 때 팍팍한 세상 같이 고생하고 웃고 떠들던 소중한 인연들이었는데, 나이 먹고 돈줄이 마르니 서로 감정만 소모하고 눈치만 보는 피곤한 관계가 되어버린 것 같아 서글픕니다. 남의 자랑 듣기 싫어서 속으로 꼬이고, 밥값 내기 아까워서 약속이 잡혀도 자꾸 몸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고 안 나가게 됩니다.
다 늙어서 옛날 인연들 억지로 붙잡고 있는 게 과연 맞는 일입니까?
괜히 감정 소모하고 아까운 돈 써가며 스트레스받을 바엔, 차라리 마음 맞는 한두 명만 가끔 보거나 아예 혼자 조용하고 편하게 지내는 게 맞는 건지 혼란스럽네요.
나이 들어서 쓸데없는 관계는 어떻게 끊어내고 진짜 남겨야 할 인간관계는 어떻게 구별해야 하는지 뾰족하고 현실적인 조언이 필요합니다.
늙어서 주변에 친구 하나 없이 독거노인처럼 쓸쓸하게 늙어가는 게 무섭다가도, 막상 만나면 이렇게 피곤하고 씁쓸한 이 어지러운 마음을 도대체 어찌 다스려야 할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